족보
  • 노계정(盧啓禎)
  • 경주노씨(慶州盧氏),  출생~사망 : 1695 ~ 1755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국휴(國休). 아버지는 노성빈(盧聖賓)이고, 어머니는 이선지(李橏之)의 딸이다.

어려서 친척인 처사 노성여(盧聖與)에게 글을 배웠으나, 계속 공부하는 것을 포기하고 무술을 연마하여, 1725년 증광시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뒤 손오병법(孫吳兵法)을 익히고 독서로 자신을 연마하다가, 1732년(영조 8) 서추(西樞) 김취로(金取魯)의 천거에 의해 수문장이 되어 출입자의 규율을 엄하게 세웠다. 1734년 훈련주부, 도총부도사를 거쳐, 이듬해 박천군수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시장을 열고 군기(軍器)를 새롭게 하였으며, 보자고(補資庫)를 설치하여 관노비들의 비용에 쓰고, 족징(族徵) 등의 민폐를 막았다.

1737년 위원군수(渭原郡守)가 되어서는 성을 쌓고 포루(砲樓)를 세우고, 장별청(壯別廳)을 설치하여, 향품무사(鄕品武士) 360인을 모아 '장별군(壯別軍)'이라 이름하고 완급에 대비하였다. 또한, 군병들의 수요를 위하여 보자고를 설치하고, 서당을 세워 교육에 힘써 지방 수령으로서 모범이 되었다.

1739년 상주영장, 선천방어사를 거쳐 어영천총이 되었다. 1742년 전라우수사가 되어 낡은 전함과 군장비를 수리하여 개조하고, 명송(明松)과 미역을 저축하였으며, 제방을 쌓아 둔전(屯田)을 만들어 1만2천냥이나 되는 돈꿰미를 저축하여 국용에 보충하도록 하였다.이 때문에 대간의 탄핵을 받았는데, 영상 김재로(金在魯)가 업적을 인정하고 전라감사 조영국(趙榮國)이 비호하여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함을 새로 만드는 데 나무로 된 닻 대신에 철로 된 닻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그뒤 어영별장을 거쳐 1743년 창성부사가 되었으나, 사조(四祖)를 모록(冒錄)하여 성명을 바꾸었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745년 곡산부사, 강화중군, 금위영천총, 초산부사 등을 지내면서 어려운 황정(荒政)에 많은 업적을 쌓았으나 개인의 영리를 꾀하였다 하여 또 한번 파직되었다. 1747년 이산부사가 되어 따로 장별군 9백여인을 모집하여 외침을 방어하려고 꾀하였으나, 이듬해 순창에 유배되었다. 1749년 풀려나 이듬해 경상좌병사, 어영도감좌별장 등을 지냈으나, 탐학하고 조정을 기만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고향에 내려가 조용히 지냈다. 지방통치에 있어 이용후생에 힘썼으나 자주 탄핵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