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무신. 부친은 별좌(別坐) 채시흠(蔡時欽)이다. 1689년(숙종 15) 5월에 어영초관(御營哨官)으로서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할 때 여러 군문(軍門)의 장교와 삼청동(三淸洞)에서 만나 서로 언약하고 상소하려고 하였는데, 대장(臺長)이 듣고 그만두게 하였다. 이에 그 사실을 들어 검토관(檢討官) 심계량(沈季良)이 왕에게 '장교의 무리가 사사로이 모이는 것은 전에 있지 않았던 것이니, 중하게 다스림이 마땅합니다.'고 아뢰어 엄히 문초 당했다.이 일로 그 해 6월에 그의 주장(主將) 윤이제(尹以濟)를 파면하려다 민암의 연백(筵白)으로 중지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목내선(睦來善)이 ' 채이장은 무부(武夫)로 처음에는 여러 군교와 의논하여 장차 상소하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주장에게 금지를 당하니 참으로 모인 일이 없다'고 아뢰었다. 그리고 이미 형신(刑訊)이 있으니 그 죄만 다스림이 마땅하다고 아뢰니 왕이 먼 변경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1683년(숙종 9)에 6품으로 천전(遷轉)되었지만 1694년(숙종 20) 금전과 군포를 모으는 무리에 또 연루되었다. 그러나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홍수헌과 장령(掌令) 안세징(安世徵), 김흥정이 그의 무고함과 심계량의 잘못을 논하였다. 1700년(숙종 26) 장흥부수재(長興府守宰)를 거쳐, 1707년 영흥부사(永興府使)를 역임했고, 1713년(숙종 39)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를 지냈다. 묘는 남양주 진건면 배양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