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박영신(朴榮臣)
  • 밀양박씨(密陽朴氏),  출생~사망 : 1578 ~ 1624
조선 후기의 무관. 자는 인보(仁輔). 병조참의 종남(宗男)의 아들이다.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웅천현감(熊川縣監)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는 것을 반대하다가 위원(渭原)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은 후금과 가까운 지역인 데다 그가 힘센 무장이라 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서 다시 진도로 이배시켰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오위장이 되었다가, 곧 경원부사가 되었으나, 노모의 봉양을 원하여 가까운 고을로 가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제수하도록 하였으나 그것도 거리가 멀어서 왕의 배려로 풍천부사(豊川府使)가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고군(孤軍)으로 평산의 기탄(○灘)을 방어하여 반란군이 서울로 직행하려는 것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모든 장수들이 반군을 바라보고 먼저 도망하였고 저탄수장(猪灘守將) 또한 도주하여 숨었다. 그는 홀로 반란군을 맞이하여 언덕을 의지하여 싸워 많은 반군을 살상하였으나 화살이 다하고 활이 꺾어져 사로잡혔다. 이괄은 평소 그의 용맹을 알고 있어 생포한 것을 기쁘게 여기고 함께 반란에 협력할 것을 백방으로 설득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반군의 장수 이수백(李守白)이 살려두면 후환이 두렵다 하여 칼로 내리쳤는데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반군의 장수들을 꾸짖었다. 병조참판에 추증하고 정문을 내렸다. 금천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