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무신. 자는 공근(公瑾). 증연성부원군(贈延城府院君) 말정(末丁)의 아들이다. 1453년(단종 1)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에 오르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참군(參軍)으로서 원종공신(原從功臣)2등에 책록되고, 세조의 가전훈도(駕前訓導)로 선발되었다. 1456년(세조 2)무과중시에 급제하여 사온서영(司○署令)이 되었다. 1459년 평양판관, 1461년 영변판관이 되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가 함길도에서 난을 일으키자 진북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 휘하의 맹비장(猛裨將)으로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특진되고, 난이 평정된 뒤 적개공신(敵愾功臣)1등에 책록되어 전토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가정대부에 특진되어 이조참판이 되고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 이해 겨울에 건주위(建州衛)야인을 정벌하는 데 참여하여 또 공을 세웠다. 이듬해 함길남도절도사가 되고, 1470년(성종 1) 북청부사를 겸임하였으며,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4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475년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479년 다시 건주위 정벌에 참전하고, 그 공으로 이듬해 자헌대부로 승진하였다. 이해 전라도절도사로 있으면서 제주관리에게 부탁하여 말을 산 죄로 파직당하였다. 그뒤 복직되어 영안도(함경도)관찰사,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지중추부사를 거쳐 1487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교체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89년 특진관에 임명되어 특히 영안도 5진에 대한 자문에 응하였으며, 이어 호조판서가 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사사로운 것 때문에 공을 버리지 않았다. 경상도지례(知禮)의 도동사(道東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양(靖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