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허형손(許亨孫)
  • 양천허씨(陽川許氏),  출생~사망 : 1427 ~ 1477
조선 초기의 무신. 유년부터 궁사에 능하여 내금위(內禁衛)에 소속되었으며, 1453년(단종 1)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부사가 되었으며, 1455년(세조 1) 오위행사정(五衛行司正)으로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어 가자되었다. 1457년 무과중시에 급제하고, 지훈련원사 겸 선전관(知訓鍊院事兼宣傳官)이 되고, 1459년 첨지중추원사에 승진하였다. 같은해 지병조사(知兵曹事)를 겸대하고, 1460년 신숙주(申叔舟)를 도원수로 하여 모련위(毛憐衛) 야인을 정벌할 때에 위장(衛將)으로 출전하여 공훈을 세우고, 철군하여 중추부부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의주목사로 파견되었다. 1463년 의주목사 재직중에 '사람을 보내어 사냥하게 하다가 야인을 만나 살해되고 포로가 되었을 때 역전(力戰)하지 않고 분궤(奔潰)하였으니 참형에 처하라.'는 의금부의 상계(上啓)로 평안도 창성군에 충군(充軍)되었다가 1466년에 사면되고, 같은해 무과 등준시(登俊試)에 급제하였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친정(親征)이 논의되면서 사자위장(獅子衛將)에 임명되고, 다음해 전라도병마절도사로 파견되었다. 1469년(예종 1) 절도사 재직중에 징병(徵兵)을 위요하여 군민(軍民)의 뇌물을 받은 사건이 발각되어 파면되었다가, 곧 인아(姻○)인 병조판서 박중선(朴仲善)에게 의뢰하여 복직되었다가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되고, 또다시 중추부사에 복직되었다. 1472년(성종 3)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행첨지중추부사, 1475년경 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죽었다. 성품이 강직하였고, 세조의 신임을 받으면서 병정(兵政)에 기여하였다. 시호는 양안(襄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