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초에 무과에 급제하여 경력(經歷)을 역임하고, 1427년(세종 9) 세자시종관이 되었다. 1435년에 여연군수가 되어 야인 2천7백여기가 성을 포위하자 도진무(都鎭撫) 이진(李震) 등과 잘 싸워 이를 격퇴하였다. 그해 5월 여연 경내에 침입한 야인이 인마(人馬)를 약탈, 도주한 사실을 몰랐다는 이유로 논란되었으나, 훌륭한 장수이며 변방을 지키는 장수를 자주 교체할 수 없다 하여 무사하였다. 1436년 야인 5백여기가 조명우구자(趙明于口子)에 침입, 남녀 14명을 납치하고 우마(牛馬) 85두를 약탈당한 책임으로 파직당하였으나, 곧 기용되어 김종서(金宗瑞) 휘하에서 경원, 종성 등지의 축성역(築城役)을 책임맡았다. 1438년에는 회령의 방어를 책임맡고 이듬해 길주목사에 임명되었다. 1442년 회령절제사, 이듬해 경원절제사를 거쳐 1445년 중추원부사가 되었고 이어서 경상우도안무처치사(慶尙右道安撫處置使) 등을 역임하였다. 1447년 함길도도절제사가 된 뒤에 1450년(문종 즉위년)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다시 함길도도절제사가 되어 북변(北邊)의 방어를 책임맡았다. 1451년 경기조전절제사(京畿助戰節制使)로 마보병(馬步兵) 3천 4백여명을 거느리고 개성부에 주둔하였으며, 이어서 경상우도도절제사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하정 겸 사은사(賀正兼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충청도처치사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2등에 책록되었다. 시호는 호양(胡襄)이다.
세종 초에 무과에 급제하여 경력(經歷)을 역임하고, 1427년(세종 9) 세자시종관이 되었다. 1435년에 여연군수가 되어 야인 2천7백여기가 성을 포위하자 도진무(都鎭撫) 이진(李震) 등과 잘 싸워 이를 격퇴하였다. 그해 5월 여연 경내에 침입한 야인이 인마(人馬)를 약탈, 도주한 사실을 몰랐다는 이유로 논란되었으나, 훌륭한 장수이며 변방을 지키는 장수를 자주 교체할 수 없다 하여 무사하였다. 1436년 야인 5백여기가 조명우구자(趙明于口子)에 침입, 남녀 14명을 납치하고 우마(牛馬) 85두를 약탈당한 책임으로 파직당하였으나, 곧 기용되어 김종서(金宗瑞) 휘하에서 경원, 종성 등지의 축성역(築城役)을 책임맡았다. 1438년에는 회령의 방어를 책임맡고 이듬해 길주목사에 임명되었다. 1442년 회령절제사, 이듬해 경원절제사를 거쳐 1445년 중추원부사가 되었고 이어서 경상우도안무처치사(慶尙右道安撫處置使) 등을 역임하였다. 1447년 함길도도절제사가 된 뒤에 1450년(문종 즉위년)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다시 함길도도절제사가 되어 북변(北邊)의 방어를 책임맡았다. 1451년 경기조전절제사(京畿助戰節制使)로 마보병(馬步兵) 3천 4백여명을 거느리고 개성부에 주둔하였으며, 이어서 경상우도도절제사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하정 겸 사은사(賀正兼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충청도처치사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2등에 책록되었다. 시호는 호양(胡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