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박원종(朴元宗)
  • 순천박씨(順天朴氏),  출생~사망 : 1467 ~ 1510
조선 초기의 무신. 반정공신(反正功臣). 자는 백윤(伯胤).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 중선(仲善)의 아들이다. 공신가문에서 태어나 음보(蔭補)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486년(성종 17) 무과에 급제하면서 성종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1492년 승정원동부승지로 발탁되자 사헌부 에서는 연소하고 무과출신인 사람에게 동반의 3품직을 제수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이의를 제기, 서경(署經)을 보류하자, 성종은 다시 공조참의로 발령하였다. 이에 대하여 사헌부가 또다시 반대하자 병조참지로 임명하였다. 그뒤 연산군의 특명으로 동부승지, 우부승지, 우승지, 좌승지를 역임하면서, 재정의 긴축문제 등 시무책(時務策)을 건의하여 실현되기도 하였으나, 점차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1500년(연산군 6)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502년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강원도관찰사,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고 1506년 경기관찰사로 나갔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마침내 1506년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모의하여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하였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우의정이 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으로 진봉(進奉)되었다. 좌의정을 거쳐 1507년 이과(李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이 되고, 이듬해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간들의 탄핵이 과하다고 하여 이를 견제하였으며, 이우증(李友曾), 조윤손(曺潤孫), 이순(李珣) 등을 천거하여 임용시키기도 하였다. 1509년 왜적이 제주도 공마선(貢馬船)을 약탈하자, 이를 문책하고자 대마도(對馬島)에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자고 건의하였으며, 전라도 조선(漕船) 40여척이 파선, 침몰하자 해운을 폐기하고 육운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같은해에 영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무신출신이었지만 문장을 즐겼고 서화를 좋아하여 수집에 힘썼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