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무인. 증조부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이조판서(吏曹判書) 신상(申○)이다. 어려서부터 김상헌(金尙憲), 이경석(李景奭) 등과 한묵(翰墨)으로 교제하다가 임진왜란 후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갈 길이 막막하던 중, 1605년(선조 38) 계묘정시무과(癸卯庭試武科)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여러 무직을 역임하고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광해군이 일시 교동에 유배되었을 때 강화 본영의 수사(水使)로 있으면서 광해군을 잘 보호했다.이 때문에 당시 대신에게 미움을 사서 밀양부사로 체직되었다. 그 뒤 정묘호란 때에는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있으면서 위엄과 덕을 모두 잃지 않아 후금의 장수 용골대(龍骨大), 마부대(馬夫大) 등의 존경을 받았다. 부총관(副摠管), 충청병사(忠淸兵使), 도총관(都摠管) 등을 역임하고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