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조경남(趙慶男)
  • 한양조씨(漢陽趙氏),  출생~사망 : 1570 ~ 1641
조선 중기의 무인.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山西), 산서병옹(山西病翁), 산서처사, 주몽당주인(晝夢堂主人). 남원 출생. 아버지는 사직 벽(璧)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이다.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사대부 의식이 투철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재(文才)가 뛰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조모의 손에 양육되었으나 기상이 활달하였다. 10세에 유인옥(柳仁沃)에게 입문하여 제술(製述)로 남을 놀라게 하였다. 13세에는 난리를 예견하여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8세에는 조헌(趙憲)의 문하로 들어가 의리와 도덕을 터득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는 군문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뜻대로 하지 못하고, 29세에 전라도병마절도사 이광악(李光岳) 막하에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 함양 등지의 왜군을 무찔렀다. 39세에는 향시(鄕試) 양장(兩場)에, 45세에는 삼장(三場)에 합격하고서도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난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54세에 겨우 진사에 등과하였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방장산(方丈山) 용추동(龍湫洞)에 별업(別業)을 짓고 산서병옹이라 자처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삼학사(三學士)의 심양(瀋陽) 순절소식에 충의를 읊기도 하였다. 사후 주포서원(周浦書院)에 향사되었다. 1582년에서 1639년까지 58년간의 사적을 일기체로 기술한 '난중잡록 亂中雜錄'이 있다. '속잡록 續雜錄'과 더불어 의병활동의 생생한 기술과 명, 청과의 외교활동의 객관적 기술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