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무인. 나주(羅州) 출생으로 양성군(陽城君) 이수광(李秀匡)의 후손이고, 정랑(正郞) 이수의(李守義)의 증손이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 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의 휘하에서 나대용(羅大用)과 함께 거북선을 만들었다. 벼슬이 유진장(留鎭將), 좌별도장(左別都將),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 만호(萬戶)가 되어 여러 해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부산 싸움에서 큰 공로를 세웠고,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순국하였다. 뒤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책정되었고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에 추증되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가 김집(金集)의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에 전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들에 살며 오고 가고 열흘밖에 안 됐는데, 부음을 듣고서는 꿈인가 생시인가 의심 했네, 우리 인생 모두가 꿈속이 아니던가, 꿈속에서 꿈속 사람 곡을 하고 있네 그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 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의 휘하에서 나대용(羅大用)과 함께 거북선을 만들었다. 벼슬이 유진장(留鎭將), 좌별도장(左別都將),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 만호(萬戶)가 되어 여러 해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부산 싸움에서 큰 공로를 세웠고,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순국하였다. 뒤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책정되었고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에 추증되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가 김집(金集)의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에 전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들에 살며 오고 가고 열흘밖에 안 됐는데, 부음을 듣고서는 꿈인가 생시인가 의심 했네, 우리 인생 모두가 꿈속이 아니던가, 꿈속에서 꿈속 사람 곡을 하고 있네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