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무신. 진사(進士) 최정(崔淨)의 차남으로 태어나 무과에 등과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충절이 남달리 뛰어났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생하자마자 안산에서 단기로 근왕한 것에서 그의 충심을 잘 알 수 있다. 10대 때부터 궁술과 기마에 능하여 어려서부터 충효의 덕목을 갖춘 덕장의 자질을 보였다. 이후 고향에 은거하며 모친을 봉양하던 중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자 52세의 나이임에도 단신으로 왕을 지키기 위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종군하였다. 전국의 근왕병이 고립된 인조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으나 청군을 물리치고 산성에 입성한 경우는 최정걸이 유일하다고 한다. 김이건(金履健)의 충신사적(忠臣事蹟)에 의하면 당시 최정걸이 청군 7명의 수급을 베어 인조에게 바쳤는데, 인조가 어주를 하사하며 그의 공을 치하했다고 한다. 같은 해 12월 29일, 청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적군을 사살하였으나 결국 사망하였고, 노비 극산(克山)이 시신을 수습하였다. 인조는 최정걸의 무공을 높이 평가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증직하고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광주군 성곶면 사리에 안장하였으며 나라에서 정려(旌閭)와 사패지(賜牌地)를 내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