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희선(希善). 임평(林枰)의 손자이자 승지(承旨) 임붕(林鵬)의 셋째 아들이며, 선조(宣祖) 때 정랑(正郞)을 지내고 시인으로도 유명한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아버지이다. 부인은 남원윤씨(南原尹氏)로 윤개(尹塏)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訓鍊院正)을 거쳐 전라수사(全羅水使), 제주목사(濟州牧使), 회령부사(會寧府使), 장흥부사(長興府使), 오도병마절도사(五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제주목사 시절에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로서 청정비(淸政碑)가 세워졌으며, 1568년(선조 1) 전라도우수사(全羅道右水使)로 있을 때에는 흑산도(黑山島)에 나타난 수적(水賊)을 토벌하여 이듬해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랐다. 그러나 1574년(선조 7) 회령부사(會寧府使) 였던 그가 기첩(妓妾) 때문에 역마(驛馬)를 거느리느라 역리(驛吏) 들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사헌부(司憲府) 로부터 가선대부의 가자(加資) 환수를 요청받기도 하였다. 그가 평안도병사(平安道兵使) 시절에 지은 시조 1수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해 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활 지어 팔에 걸고, 칼 갈아 옆에 차고, 철옹성변(鐵瓮城邊)에 통개(筒盖) 베고 누웠으니, 보완다 보괴라, 소리에 잠 못 들어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