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효백(孝伯). 아버지는 장사랑 석린(石麟)이며, 어머니는 통사랑 노공좌(盧公佐)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고, 1609년(광해군 1)에 부장(部將)에 이르렀으나 1611년에 파직되어 임천(林川)으로 돌아갔다. 다리에 병이 있어 한가롭게 지낸 지 몇 년이 되었으나 무용으로 이름이 있었다. 1618년에 다시 기용되어 명나라의 요청으로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나선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의 휘하에 들어가 심하(深河)에서 싸우다가 김응하(金應河)와 함께 1619년 전사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자손들의 상소로 병조참의로 추증되었고, 1681년(숙종 7) 정려를 요구하는 자손들의 청이 있자 예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의 특명으로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