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중식(仲植). 홍평군(洪平君) 종장(宗張)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 안주목사로 있다가 한때 견책을 받아 평안도 우후(平安道虞候)로 좌천되고, 뒤에 선천부사가 되었다. 1624년 용천부사로 있을 때 부원수 겸 평안병사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원수 장만(張○)을 따라 반란군을 길마재〔鞍峴〕에서 격파,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홍양군(洪陽君)에 봉하여졌다. 반란이 평정된 뒤 임지에 돌아가 용천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비하여 손수 앞장서서 백성과 함께 용골산성(龍骨山城)을 쌓았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의주, 안주가 함락되어 적이 깊숙히 들어오자 성을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적진에 뛰어들어 일전을 결심, 운암(雲巖)에 이르러 한판 승부를 겨루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뒤 반인(叛人) 장사준(張士俊)을 죽인 의병장 정봉수(鄭鳳壽)가 용골산성에서 적을 물리치고, 승첩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전일 이희건의 산성 수축이 큰 도움이 되었다. 뒤에 부민(府民)들이 그 공덕을 찬양하여 비를 세웠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숙종 때 용천의 충렬사(忠烈祠),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장렬(壯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