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허완(許完)
  • 양천허씨(陽川許氏),  출생~사망 : 1569 ~ 1637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자고(子固). 아버지는 증호조참판 기이며, 어머니는 경산이씨(京山李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기송(記誦)을 잘하고 필법에 능하였으나, 재략(才略)을 좋아하고 사장(詞章)에 얽매이지 않아 당시의 유명한 무인 유비(柳斐), 성우길(成佑吉) 등과 무예를 겨루었다. 1593년(선조 26) 무과에 급제, 남쪽해변을 지킬 때 이순신(李舜臣)이 보고 장수의 재목이라 하여 특별히 대해주었고, 돌아와서는 선전관, 비국랑(備局郞)을 역임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남평현감이 된 후 도총부도사, 경력 등을 거쳐, 단천군수가 되었다. 이때 여진족의 침입을 물리쳐 공을 세우고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 무산진첨절제사에 제수되고, 얼마 뒤 훈련중군, 호서수군절도사, 호남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는데, 간 데마다 군사들을 사랑하여 신망이 두터웠다. 광해군의 난정을 당하여 9년 동안 은거하고 있다가 인조반정 후 다시 중군에 등용되어 군졸들의 마음을 수습하였다. 외직에 나가 있는 동안 권귀인(權貴人)의 비위를 건드려 파직당하고, 정묘호란 때 다시 중군이 되어 왕을 호종한 공으로 가선대부로 승자, 영남우도절도사 겸 진주목사를 거쳐, 회령도호부사를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영남좌도절도사로 있던 그는 보병 1만여명을 이끌고 북진하여 남한산성에 포위당하여 있던 왕을 구하려 하였으나,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적을 만나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뒤에 왕이이 소식을 듣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병조판서에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