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율연(栗然). 호는 오의정(五宜亭). 증조부는 생원 이번(李蕃)이고, 조부는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며, 부친은 승지(承旨)로 추증된 수암(守庵) 이응인(李應仁)이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고 행실이 올바르고 곧았다. 널리 책을 읽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더불어 무예를 익혔다. 임진왜란 일어나자 맏형을 대신하여 군량감봉유사(軍粮監捧有司)를 맡았다.이 때 여러 해 동안에 전란과 흉년으로 양식이 매우 궁핍한 상태였으나, 그는 전력투구하여 군량미를 주선하여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최선을 하였다. 심지어 가산을 기울여 명나라에서 파견된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도우니, 그가 매우 훌륭하게 여겨 시를 지어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공명(功名)을 헤아리지 않고, 오직 가형(家兄)을 위하여 나를 돕는구나!'고 하였다. 평소 그의 인품과 성실함을 인정한 경주부윤(慶州府尹) 박의장(朴毅長)은 그를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에게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한산도로 간 그는 이순신 장군을 보좌하여 여러 전략을 도모하며 큰 공을 세웠다. 이에 이순신이 그의 인물됨과 실력을 매우 귀중하게 여겨 조정에 보고했고, 그는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으로 제수 되었다. 또 이순신이 박의장 에게도 서신을 보내 사람을 잘 판단하고 자신에게 소개한 것을 치하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이 순국하고 왜구와 화의(和議)가 성사되자, 그는 초연히 고향으로 돌아와 오의정(五宜亭)이라는 작은 정자를 집 뒤에 짓고 여생을 보냈다. 문집으로 '오의정집(五宜亭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