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선승(善承). 절도사 이윤검(李允儉)의 고손이고, 증조가 홍문관수찬 이희증(李希曾)이며, 아버지는 이천수(李天受)이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한 뒤 1600년 선전관이 되어 무변(武弁)으로 비변사낭관을 겸하고, 1609년(광해군 1) 청하현감이 되었다가 1612년 조그마한 일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 1618년에 성진첨절제사로 나가 방어에 철저를 기하고 그 공로로 절충계(折衝階)에 올랐으며, 임기가 끝나자 함흥별장이 되었다.
1620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계(加階), 구성부사가 되었다. 당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군사가 용천(龍川)에 주둔하였는데 기율이 서 있지 않아 촌야가 소란하였으며, 각 읍 수령들이 그들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일이 허다하였으나, 구성부만은 정령(政令)이 엄하고 분명하여 그는 지방민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이어 좌영장이 되었을 때 갑자기 적의 기병이 이웃 고을에 박두하였다는 급보가 와서 좌우사람들이 산 속으로 피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그는 군사가 먼저 움직임은 옳지 못하다고 거절하였다.
1623년에 위장(衛將)이 되어 조정에 돌아왔다가 부원수 이괄(李适)이 영변에 병영을 설치하자 중군으로 그 휘하에 있었으나 이괄의 교만하고 방자함을 꺼려하였다.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별장 이순무(李舜懋)와 함께 도원수 장만(張晩) 에게로 탈출하였다가 난이 점점 확대되자 반역자를 처단하지 못한 일을 자책하고 자결하였다. 뒤에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1등에 추록되고, 형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다시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가증되어 정문이 세워졌다. 옥계(玉溪)의 충현사(忠賢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장의(壯毅)이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한 뒤 1600년 선전관이 되어 무변(武弁)으로 비변사낭관을 겸하고, 1609년(광해군 1) 청하현감이 되었다가 1612년 조그마한 일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 1618년에 성진첨절제사로 나가 방어에 철저를 기하고 그 공로로 절충계(折衝階)에 올랐으며, 임기가 끝나자 함흥별장이 되었다.
1620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계(加階), 구성부사가 되었다. 당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군사가 용천(龍川)에 주둔하였는데 기율이 서 있지 않아 촌야가 소란하였으며, 각 읍 수령들이 그들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일이 허다하였으나, 구성부만은 정령(政令)이 엄하고 분명하여 그는 지방민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이어 좌영장이 되었을 때 갑자기 적의 기병이 이웃 고을에 박두하였다는 급보가 와서 좌우사람들이 산 속으로 피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그는 군사가 먼저 움직임은 옳지 못하다고 거절하였다.
1623년에 위장(衛將)이 되어 조정에 돌아왔다가 부원수 이괄(李适)이 영변에 병영을 설치하자 중군으로 그 휘하에 있었으나 이괄의 교만하고 방자함을 꺼려하였다.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별장 이순무(李舜懋)와 함께 도원수 장만(張晩) 에게로 탈출하였다가 난이 점점 확대되자 반역자를 처단하지 못한 일을 자책하고 자결하였다. 뒤에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1등에 추록되고, 형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다시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가증되어 정문이 세워졌다. 옥계(玉溪)의 충현사(忠賢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장의(壯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