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득남(金得男)
  • 광산김씨(光山金氏),  출생~사망 : 1591 ~ 1637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선술(先述). 호는 매죽헌(梅竹軒). 김득남(金得男)의 부친은 김억창(金億昌) 으로, 함평에서 태어났다. 김득남은 신장이 매우 컸으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젊어서 무과에 급제하여 서천포만호(舒川浦萬戶)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함녕군(咸寧君) 이항(李沆)을 따라 반정군에 가담하여 앞장서서 입궐하였다. 그는 옥새를 주어 그의 공으로 삼지 않고 그 공을 이항에게 돌렸다. 그는 그 공으로 사도첨사(蛇島僉使)에 제수되었다. 1635년(인조 13) 형조의 절충(折衝)으로 있을 때, 화적인 민수이(閔守伊)를 잡아 공을 세웠다. 그가 한강의 철곶첨사(鐵串僉使)로 있을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강화도에 청나라 군사가 침입하였다. 그는 한양에서 강화도로 통하는 길목인 부평(富平)에서 청군이 민간인을 포로로 잡아가자, 그들을 탈환할 군사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자원하는 군사가 없었는데, 그는 홀로 자원하였다.이 소식을 듣고 당시 대군으로 있던 효종이 그에게 백마 한 필을 하사하였다. 그는 양정(梁挺) 등과 함께 강화도에서 나와 부평 근처에서 적에게 항전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이 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증한성판윤(贈漢城判尹)을 내려주었고, 강화 표충사(表忠祠)에 제향하게 하였다. 그의 아들인 김방보(金邦寶) 역시 무장으로 난포만호(蘭浦萬戶)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