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사윤(士允). 아버지는 창의별장(倡義別將) 대립(大立)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아버지가 창의별장으로서 많은 의병을 모아 흥양(興陽)에서 적을 무찌르다가 전사하자 이를 복수하려는 일념으로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였다. 한때, 균전사 권진(權縉)이 호남의 민전(民田)을 감사하기 위해 내려왔을 때 그의 용맹성을 보고 대성할 것을 예견하였다. 또한, 도사(都事) 김시강(金時講)이 유생들에게 강을 하과할 때 그는 자청하여 병서(兵書)를 훌륭하게 강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무과에 급제, 북변(北邊)의 수비에 종사하고 돌아온 뒤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수군통제사 구굉(具宏)의 막료가 되어 그의 천거로 선전관이 되고, 이어서 전라도병마우후(全羅道兵馬虞候)를 거쳐, 1635년에는 홍원현감(洪原縣監)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북병사 이항(李沆), 남병사 서우신(徐佑申) 휘하의 척후장(斥候將)으로 남한산성 구원에 나섰다. 그러나 양근(楊根)에 이르렀을 때 이미 강화가 성립되자, 중영(中營)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며 본국으로 철수하는 청군 소속의 몽고병을 추격, 안변남산역(安邊南山驛)에 이르러 전후영장(前後營將)과 함께 적을 공격, 부족한 병력으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전라남도 흥양 세충사(世忠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