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안위(安衛)
  • 순흥안씨(順興安氏),  출생~사망 : 1563 ~ ?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대훈(大勳). 정여립(鄭汝立)의 5촌 조카로 1589년(선조 22)의 기축옥사 때 평안도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 무과에 급제, 찰방이 되었으며 이듬해 이항복(李恒福)의 천거로 거제현령이 되었다. 1594년 제2차당항포해전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전부장(前部將)으로 공을 세웠으며, 1597년 1월 부산의 왜군 화약고에 불을 질러 이를 폭파시켰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통제사 이순신의 지휘하에 김억기(金億祺)와 함께 벽파정(碧波亭) 앞바다에서 왜선 20여척을 격파, 선조 로부터 '무경칠서 武經七書'를 상으로 하사받았다. 이듬해 전라우수사가 되고 1601년에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역적 정여립의 조카라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1603년 공신도감이 임진왜란 때의 전공자로서 선무공신(宣武功臣)을 뽑을 때 20명 가운데 들었다. 그해 전라좌수사가 되었는데 방군징포(放軍徵布)하였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다시 파직당하였다. 1605년에 충청수사로 재기용되고 이듬해 경상좌수사, 1612년(광해군 4) 포도가대장(捕盜假大將)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있던 중 동향인 진사 조덕홍(趙德弘), 조응직(趙應○○) 등의 역모를 고하였다가 무고임이 드러나 반좌(反坐)되어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곧 재기용되어 평안도 강변별장이 되고 1619년 평안도방어사, 1624년(인조 2) 행사용(行司勇)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74세의 노령임에도 왕을 호종하기 위하여 상경하다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중에 돌아왔다. 김제의 학당사(學堂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