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경원(慶源). 호는 죽포(竹圃). 부친은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증직된 우계당(友溪堂) 김순(金洵)이다. 선천적으로 골격이 크고 재주와 용기가 뛰어났다. 일찍이 8세 때 시를 지었는데, 그 시구는 '봉화(烽火)는 천리 밖의 통신을 전하고 종(鐘) 소리는 수많은 가정에 때를 알린다'라고 하였다.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평소 여러 경전과 역사책을 두루 읽었는데, 특히 병학(兵學)에 정통했다. 1571년(선조 4)에 무과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부친의 명으로 의병을 일으켰고, 아우 김광록(金光祿)과 조카 김몽화(金夢和)와 더불어 군무를 감독하였다. 경주부윤(慶州府尹) 윤인함(尹仁函)이 정병(正兵)을 내주어 서생포(徐生浦) 전투에서 여러번 싸워 대첩을 거두었다. 항상 전쟁에 임할 때 분연히 맹세하여 말하기를 '온 나라가 크게 어지러운데, 신하된 도리로써 어찌 감히 삶을 찾겠는가○'하였고,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공을 세웠다. 팔공산과 화왕산(火旺山) 회맹(會盟)에 달려가니,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일찍이 말하기를 '용맹을 떨치며 돌격하여 큰 군사를 모두 거느릴 자는 김 장군 한 사람뿐이다'고 하였다. 전란이 평정된 후 부모상을 당하여 6년 동안 시묘하며 상제를 마쳤다. 어사 이상신(李尙信)이 조정에 아뢰기를 '효성은 신명과 통하고 충성은 월일에 꿰었다'하였다.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제수되었다. 원종공신 2등에 녹선되었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품계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