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무신. 공조판서 겸 도총관 협의 아들이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였고, 강계부사를 역임한 끝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물러가 있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주부사(慶州府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먼저 경주를 점령하여 부임하지 못하고, 이듬해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경기방어사가 되었다. 이천부사(利川府使)가 되어서는 여주목사 원호(元豪)와 협력하여 남한강에서 적을 무찔렀다. 1594년 광주, 이천, 양주의 산간에 출몰하는 토적(土賊)을 토벌하였으며, 한강 상류 용진(龍津)에 승군을 동원하여 목책(木○)을 구축하여 병졸을 훈련하였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용진과 여주 파사성(婆娑城)을 수비하였다. 광해군 때에 훈련대장과 판윤 에까지 승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박응서(朴應犀)의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혜(襄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