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무신, 학자. 자는 경개(景蓋). 호는 석계(石溪). 아버지는 군자감직장 인 상장(尙長)이며, 어머니는 동복오씨(同福吳氏)로 찰방 익후(益厚)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향시(鄕試)를 거쳐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에 임명되었으나, 그를 시기하는 사람의 모함을 입어 삭과(削科)되었다. 그뒤 무예를 닦아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었다가 얼마 뒤 회령첨사(會寧僉使)를 지내고 경상병사가 되었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일시 고향에서 휴양하고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각지로 격문을 보내 의병 수만명을 모은 뒤 부사를 지낸 나적(羅迪)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장이 되어 장성으로 진군하였다. 그때 적군이 남원성을 포위하고 있어 군량이 부족하므로 여러 군에 격문을 보내 의곡(義穀) 800여섬을 얻어 군량을 확보하고, 남원성으로 진격하여 적장 7인을 베고 전사하였다. 그뒤 나라에서는 그의 전공을 높이 치하하여 병조참판의 증직을 내렸다. 저서로는 '석계결고'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