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무신. 자는 선지(善之). 호는 소요당(逍遙堂). 함평군(咸平君) 이극명(李克明)의 손자이자, 호군(護軍) 이종수(李從遂)의 아들로 나주(羅州)에서 태어나 1494년(성종 25) 무과에 급제하였다. 1561년(명종 16) 신유식년문과(辛酉式年文科)에 을과 6등으로 합격한 죽담(竹潭) 이유근(李惟謹)이 그의 손자이다. 1500년(연산군 6) 6월에 해랑도(海狼島) 초무사(招撫使) 전여림(田汝霖)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성순동(成順仝), 정극인(鄭克仁) 등과 함께 해랑적(海浪賊)을 사로잡은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505년(연산군 11) 8월 당시 경상우도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 였던 그는 조라포(助羅浦)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하지 못한 책임으로 우후(虞侯) 김경조(金敬祖)와 만호(萬戶) 조윤침(趙允琛)과 함께 징계되기도 했지만 1507년(중종 2) 9월 평안도조방장(平安道助防將)으로 차출되었다. 1521년(중종 16) 전라도수사(全羅道水使)가 되어 왜적을 격파한 군공으로 통정대부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그 이듬해 5월 왜적들이 추자도(楸子島)에서 30여 명의 백성들을 살상하자 다시 전라도좌수사(全羅道左水使)가 되어 왜인을 격퇴시켰다. 이후에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소요정(逍遙亭)을 짓고 여생을 보내다가 1533년(중종 28)에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