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구수영(具壽永)
  • 능성구씨(綾城具氏),  출생~사망 : 1456 ~ 1523
조선 전기의 무신. 자는 미숙(眉叔).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치홍(致洪)이며, 어머니는 진천송씨(鎭川宋氏)로 좌랑 계후(啓後)의 딸이다. 큰아버지는 영의정 치관(致寬)이다. 12세에 영응대군(永膺大君: 세종의 여덟째 아들)의 사위로 뽑혀 세조 로부터 특별히 선략장군부호군(宣略將軍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예종이 즉위한 뒤에는 은총을 입어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르고, 성종이 즉위하자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으며,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곧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493년(성종 24)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이 되어 군대통솔의 책임을 맡았고, 이어 상의원제조(尙衣院提調)를 지냈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다시 도총관을 역임하고, 1501년(연산군 7)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올랐다. 이때 대간들이 인물이 부적당하다고 탄핵하였으나 오히려 판돈령부사로 승진되고, 이듬해에는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505년에는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가 되어, 흥청(興淸) 2백인, 운평(運平) 1천인, 광희(光熙) 1천인을 모아 악률을 교육하면서, 연산군의 유락(遊樂)을 도왔으며, 그 공로로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그때 박원종(朴元宗) 등이 중종반정을 도모하자, 이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하였다가, 연산군의 충복이었다고 하여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고 성품이 자상했으며 음률과 악기에 재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