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봉석주(奉石柱)
  • 하음봉씨(河陰奉氏),  출생~사망 : ? ~ 1465
조선 전기의 무신. 자는 군보(君輔). 호는 서관(墅觀). 용감하고 활을 잘 쏘아 명궁으로 알려졌으며, 격구(擊毬)는 당대의 제일인자이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김종서(金宗瑞) 등 단종추대세력을 타도하기 위하여 일으킨 계유정난 때 공을 세워 정난이등공신에 책록되고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면서 강성군(江城君)으로 책봉되었다. 1456년(세조 2)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고 이듬해 도진무(都鎭撫)가 되었다. 그러나 원래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혹독하여 고리대금으로 치부하였다. 1460년 전라도처치사(全羅道處置使)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행상호군(行上護軍)으로서 전라도처치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선군(船軍) 30인으로 하여금 황원곶목장(黃原串牧場)의 묵은 땅을 경작하게 하여 면화 74석(石) 6두(斗)를 거두어 횡령한 것이 문제가 되어 탄핵을 받았다. 1462년 강무(講武) 때에는 사대장(射隊將)이 되었다. 또, 전라수사로 있을 때에는 군졸들을 이끌고 여러 섬에 참깨와 목화 등을 심게 하고 그 수확을 착복하여, 그의 창고는 국고나 다름없이 많은 곡식과 재물로 가득찼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 난신들의 처첩을 공신에게 나누어 노비로 삼을 때 그 중에서 예쁜 여자들을 골라서 첩으로 삼는 등, 그의 탐욕함과 혹독함 때문에 1464년 의금부에 갇혔으나 곧 풀려났다. 그러나 이듬해 역모죄로 몰리어 김처의(金處義), 최윤(崔潤) 등과 같이 주살당하여 훈작과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495년(연산군 1) 자손들의 상소로 신원되고 훈작인 강성군을 회복하였다. 또, 선조 때 훈안(勳案)을 증수할 때에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1794년(정조 18) 자손들이 또 상소를 올려서 시호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