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무신. 나주(羅州) 출생으로 김지진(金至珍)의 손자이자 김천해(金千海)의 아들이다. 부인은 순흥안씨(順興安氏)이고, 아들 김호인(金好仁)은 1450년(문종 1) 경오식년문과(庚午式年文科)에 정과(丁科) 22등으로 급제하였다.
1434년(세종 16) 무과에 합격하였고, 1447년(세종 29)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거쳐 1450년(문종 1)에는 판삭주도호부사(判朔州都護府事), 판영변도호부사(判寧邊都護府事)에 제수되었으며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에까지 올랐다. 그의 성품이 청렴 정직하여 백 칸의 집을 하사받았고 '사직신(社稷臣)'이라 칭하였다. 단종(端宗)이 일찍 죽자, 1455년(세조 1) 굶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부인도 함께 죽어 합장하였는데, 지금 나주시 대호동 기동마을 동신대학교 부지 내에 있다. 이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평동면(平洞面) 복룡하(伏龍下)를 하사받았다.
1434년(세종 16) 무과에 합격하였고, 1447년(세종 29)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거쳐 1450년(문종 1)에는 판삭주도호부사(判朔州都護府事), 판영변도호부사(判寧邊都護府事)에 제수되었으며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에까지 올랐다. 그의 성품이 청렴 정직하여 백 칸의 집을 하사받았고 '사직신(社稷臣)'이라 칭하였다. 단종(端宗)이 일찍 죽자, 1455년(세조 1) 굶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부인도 함께 죽어 합장하였는데, 지금 나주시 대호동 기동마을 동신대학교 부지 내에 있다. 이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평동면(平洞面) 복룡하(伏龍下)를 하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