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용원(金鏞元)
  • 청풍김씨(淸風金氏),  출생~사망 : 1842 ~ ?
조선 말기의 무신. 호는 미사(薇史). 1876년 제1차 수신사 김기수(金綺秀)가 일본에 파견될 때 부사과(副司果)로서 화원(畵員)의 직분을 띠고 수행하였다. 그뒤 견외사절(遣外使節)로서 활약하였으며, 1881년 경상좌도 수군우후(水軍虞候)를 역임하였다. 이때 정부는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으로 파견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유람단은 3차에 걸쳐 충원되었는데, 기선(汽船)과 총포(銃砲)구입을 담당하였던 참모관(參謀官) 이동인(李東仁)이 2월 15일경 실종되었다. 이에 김용원은 이동인 대신에 기선운항에 관계된 제반사항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지시를 받고, 2월 26일경에 유람단의 조사(朝士)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인천개항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수행원 손붕구(孫鵬九), 통사(通事) 김대홍(金大弘)을 대동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사들이 복명(復命)한 뒤에도 일본에 그대로 남아 임무와 직접 관련이 없는 화학과 양잠학(養蠶學)을 배웠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이른바 제1차 한로밀약설(第一次韓露密約說)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즉, 전 영령관(營領官) 권동수(權東壽)와 함께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조선의 보호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그들 러시아측 회답문의 내용이 누설됨으로써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이 과연 연로거청(聯露拒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