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병무(李秉武)
  • 전주이씨(全州李氏),  출생~사망 : 1864 ~ 1926
조선 말기의 무신. 1884년(고종 21)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친군통위영대관(親軍統衛營隊官), 훈련원주부를 거쳤다. 1894년 친군장위영좌대우참령관, 동영우대부령관을 역임하였다. 같은해 보빙사(報聘使) 의친왕(義親王) 강(堈)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서, 일본 육군교도단에서 수업하였고, 이듬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졸업하였다. 귀국 후 육군보병정위로 육군무관학교 교관을 거쳐, 육군보병참령(陸軍步兵參領), 무관학교교두(武官學校校頭), 북청진위대대대장, 진위 제5연대2대대 대대장 등을 지냈다. 1904년 고군산으로 유배당하였으나 곧 징계를 면하고, 육군무관학교장 겸임 육군유년학교장이 되었다. 1905년 보병정령, 군부교육국장, 육군참장, 칙임군부교육국장(勅任軍部敎育局長)이 되었고, 이듬해 훈삼등팔괘장(勳三等八卦章)을 받았다. 또 보빙사 완순군(完順君)을 수행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훈이등서보장(勳二等瑞寶章)을 받은 뒤 귀국히였고, 진위대검열사가 되었다. 1907년에는 이완용 내각의 군부대신임시서리시종무관장으로 고종 양위와 군대해산에 적극 협조하였다. 그러한 공로로 정2품으로, 2개월 뒤에는 종1품으로 특별승자(特別陞資)되었고, 훈이등태극장(勳二等太極章)과 일본 정부로부터 훈일등욱일장(勳一等旭日章)을 받았다. 1909년 친위청장관, 시종무관장이 되었다가 이듬해 대훈이화대수장(大勳李花大授章)을 받고, 일본의 한국병합에 적극적으로 동의, 협조하여 자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