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방응모(方應謨)
  • 온양방씨(溫陽方氏),  출생~사망 : 1883 ~ ?
조선일보사 사장. 호는 계초(啓礎).

1883년 1월 3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주면(뒤에 고안면으로 바뀜.) 소암동에서 방계준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아버지 방계준은 가난한 선비로 농업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 나갔다. 방응모의 위로 형 방응곤이 있었는데, 후일 조선일보의 사주가 되는 방일영과 방우영 형제의 아버지 방재윤의 생부, 즉 그들의 할아버지가 바로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이었다. 어려서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방응모는 정규 학교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히다가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 뒤 우연히 경성부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17세에 독학으로 신학문과 일본어, 중국어, 수학 등을 독파하였다. 1911년에는 신식 학교에서 교사로 일시적으로 교편을 잡았으나 그만두었다. 11년 정주읍내 변호사 사무소에 취직, 1914년까지 대서업에 종사했다. 1915년 자신의 집을 이용해 여관업을 시작했다.

1923년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다가, 1925년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의 교동광업소(橋洞鑛業所)를 시작하여 큰 돈을 벌었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사의 경영권을 계승하여 이해 7월 자본금 30만원의 주식회사로 등기를 마쳤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뒤부터 '조선일보'는 경영면에서 안정을 이루고 사세가 확장되었다. 1935년 7월에는 서울특별시 태평로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하여 월간잡지 '조광(朝光)', '여성(女性)', '소년(少年)' 등을 차례로 창간하였다. 1933년 이심회(以心會)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뒤에 이를 서중회(序中會)로 고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1936년에는 동방문화학원(東邦文化學院)을 설립했고, 1946년 숭문상업중학교(崇文商業中學校)를 경영하였다. 이밖에도 함경남도 영흥군의 조림사업, 서해안의 간척사업 등을 벌이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조선일보'를 복간하여 다시 오늘의 '조선일보'를 이룩하는 토대를 세웠다.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유골 봉환 사업과 신탁통치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인 조소앙과 사회당을 결성해 문교정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했으나 차점자로 낙선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피난을 가지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 납북 후 행적은 '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라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