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교동국민학교를 졸업하였으나 고아나 다름없는 부랑아생활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민족항일기 말기에는 종로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주먹왕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김좌진의 아들임을 긍지로 삼아 일제의 무기고를 폭파하거나 조선인 상인을 보호하는 등의 협객으로도 행동하였다.
광복 이후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 신익희(申翼熙) 등이 주도하는 대한청년단의 감찰부장을 맡아 반공대열의 최선봉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반공투쟁과정에서 살상행위를 서슴지 않아 미군정청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고 오키나와 미군부대에 수감되었다. 사형집행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대한민국정부수립을 맞아 그 집행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정부수립 이후에도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최고위원, 대한학도의용군 참모장 등을 역임하면서 반공, 노동운동을 계속하였다.
1954년 종로을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3대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65년에도 제6대국회의원보궐선거에서 당선되는 등 정치사에도 행적을 남기었다. 용산구의 보궐선거로 제6대국회에 등단하자마자 한독당내란음모사건과 관련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으나 야당은 물론 공화당까지 석방결의안에 106표의 찬성표를 던져 석방되었다. 그러나 국회에서 사카린밀수사건을 논란중일 때 국무위원에게 똥물을 뒤집어씌운, 이른바 국회오물투척사건으로 의정사상 전대미문의 오점을 남기고 다시 서대문감옥에 수감되는 기이한 행적을 남기었다. 결국 1966년 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그의 독특한 정치생활은 막을 내렸다. 정계은퇴 후 고혈압으로 1972년 11월 죽었다.
서울 교동국민학교를 졸업하였으나 고아나 다름없는 부랑아생활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민족항일기 말기에는 종로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주먹왕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김좌진의 아들임을 긍지로 삼아 일제의 무기고를 폭파하거나 조선인 상인을 보호하는 등의 협객으로도 행동하였다.
광복 이후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 신익희(申翼熙) 등이 주도하는 대한청년단의 감찰부장을 맡아 반공대열의 최선봉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반공투쟁과정에서 살상행위를 서슴지 않아 미군정청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고 오키나와 미군부대에 수감되었다. 사형집행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대한민국정부수립을 맞아 그 집행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정부수립 이후에도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최고위원, 대한학도의용군 참모장 등을 역임하면서 반공, 노동운동을 계속하였다.
1954년 종로을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3대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65년에도 제6대국회의원보궐선거에서 당선되는 등 정치사에도 행적을 남기었다. 용산구의 보궐선거로 제6대국회에 등단하자마자 한독당내란음모사건과 관련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으나 야당은 물론 공화당까지 석방결의안에 106표의 찬성표를 던져 석방되었다. 그러나 국회에서 사카린밀수사건을 논란중일 때 국무위원에게 똥물을 뒤집어씌운, 이른바 국회오물투척사건으로 의정사상 전대미문의 오점을 남기고 다시 서대문감옥에 수감되는 기이한 행적을 남기었다. 결국 1966년 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그의 독특한 정치생활은 막을 내렸다. 정계은퇴 후 고혈압으로 1972년 11월 죽었다.
묘지는 서울 수유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