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대 국무총리. 정치인. 1896년 4월 8일 부산 출생.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였다.
3.1운동 당시 직접 시위에 참여하였고, 이어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조직에 가담하였다. 세계적인 안목을 넓히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프랑스에 갔으며, 그곳에서 재프랑스한국인거류민회장이 되었고, 다시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한국학생회장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뉴욕에서 공부도 하면서 생업에 종사하였고, 특히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운동을 직접 도왔다.
1922년 미국의 한인교민총단장이 되었으며, 미국 교민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 창간된 '3.1신보'의 사장이 되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에 관여하였으며 좌익에 맞서 우익의 대표적인 정객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의원선거 때 부산을구에서 한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교통부장관이 되었으며, 이어 1950∼1952년에는 사회부장관으로 전시의 혼란기에 수많은 이재민과 고아들을 돕는 정부의 정책에 헌신하였다.
1951∼1952년에는 국무총리서리, 1957∼1959년에는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또한, 자유당 말기인 1959년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활약하였다. 그의 정치활동 중 가장 각광을 받았던 것은 1960년 4.19 이후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을 때였다. 외무부장관을 겸직하면서이 시기 한국정치사회의 혼란을 수습해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난 뒤 과도정부 내각수반으로 국정의 공백을 처리하게 되었는데, 한편으로는 이승만 등 자유당인사들에 대한 학생들의 강경한 처벌의 주장과,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당 정치세력들이 요구하는 정권이양 등의 압력을 받으면서도 국가의 기강과 정통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먼저, 하야한 이승만을 하와이로 망명하게 하였으며, 정치의 소용돌이를 정상화하기 위해서 선거를 치렀고 새로이 발족한 내각에 권한을 인계하였다.
4.19 이후 그가 보여준 정치적 행동에 대한 논의는 여러 갈래로 이해되고 있지만, 혁명의 불길을 개혁의 성격으로 전환시키면서 사회를 안정시켰다는 기여를 지적할 수 있다. 1963년 박정희(朴正熙) 군정이 민정으로 이양되려던 시기에 '국민의 당'을 창당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어 대통령후보로 내정되었으나 야당후보단일화를 위하여 윤보선(尹潽善)에게 양보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이 패배한 뒤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1969년부터 1984년까지 통일원 고문, 1980년까지 국정자문위원으로 일하였다. 청렴 강직한 성격은 몇 안 되는 한국정계의 원로로 대우받게 하였다. 인촌문화상(仁村文化賞)을 받았으며, 자서전으로 '내일을 위한 증언'이 있다.
3.1운동 당시 직접 시위에 참여하였고, 이어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조직에 가담하였다. 세계적인 안목을 넓히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프랑스에 갔으며, 그곳에서 재프랑스한국인거류민회장이 되었고, 다시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한국학생회장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뉴욕에서 공부도 하면서 생업에 종사하였고, 특히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운동을 직접 도왔다.
1922년 미국의 한인교민총단장이 되었으며, 미국 교민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 창간된 '3.1신보'의 사장이 되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에 관여하였으며 좌익에 맞서 우익의 대표적인 정객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의원선거 때 부산을구에서 한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교통부장관이 되었으며, 이어 1950∼1952년에는 사회부장관으로 전시의 혼란기에 수많은 이재민과 고아들을 돕는 정부의 정책에 헌신하였다.
1951∼1952년에는 국무총리서리, 1957∼1959년에는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또한, 자유당 말기인 1959년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활약하였다. 그의 정치활동 중 가장 각광을 받았던 것은 1960년 4.19 이후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을 때였다. 외무부장관을 겸직하면서이 시기 한국정치사회의 혼란을 수습해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난 뒤 과도정부 내각수반으로 국정의 공백을 처리하게 되었는데, 한편으로는 이승만 등 자유당인사들에 대한 학생들의 강경한 처벌의 주장과,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당 정치세력들이 요구하는 정권이양 등의 압력을 받으면서도 국가의 기강과 정통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먼저, 하야한 이승만을 하와이로 망명하게 하였으며, 정치의 소용돌이를 정상화하기 위해서 선거를 치렀고 새로이 발족한 내각에 권한을 인계하였다.
4.19 이후 그가 보여준 정치적 행동에 대한 논의는 여러 갈래로 이해되고 있지만, 혁명의 불길을 개혁의 성격으로 전환시키면서 사회를 안정시켰다는 기여를 지적할 수 있다. 1963년 박정희(朴正熙) 군정이 민정으로 이양되려던 시기에 '국민의 당'을 창당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어 대통령후보로 내정되었으나 야당후보단일화를 위하여 윤보선(尹潽善)에게 양보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이 패배한 뒤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1969년부터 1984년까지 통일원 고문, 1980년까지 국정자문위원으로 일하였다. 청렴 강직한 성격은 몇 안 되는 한국정계의 원로로 대우받게 하였다. 인촌문화상(仁村文化賞)을 받았으며, 자서전으로 '내일을 위한 증언'이 있다.
1988년 9월 18일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