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서울의 보성학교(普成學校)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형편으로 중퇴, 선교사 무스(Moose, J. R.)의 통역으로 있다가 그의 도움으로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이오와주의 패사디나시 헌팅턴호텔 등에서 일하면서 고학으로 1923년 주립대학인 데이버대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뉴욕에서 허정(許政) 등과 함께 삼일신문(三一新聞) 발간에 참여하다가 1934년 귀국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청에 들어가 군정재판장의 통역을 역임하고, 군정청 민주의원의장을 지낸 이승만(李承晩)의 신임을 받아 비서가 되었다. 1946년 대한기독청년회, 대한적십자사 등의 이사를 역임하면서 사회적 발판을 다졌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로서 정치적 기반이 굳혀졌다. 1949년 서울특별시장, 1951년 4월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어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 시절에 발생한 '국민방위군사건' 처리에 솜씨를 발휘하였다. 같은해 12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족청계 이범석(李範奭)과 함께 자유당을 창당하여 세칭 발췌개헌안 통과에 일역을 담당하였다.
1952년 대한체육회장이 되었고, 1953년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어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진출하였으며, 한미재단 한국사무소장직도 역임하였다. 같은해 12월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올라 명실공히 자유당의 제2인자가 되었다. 1954년 3월에 개최된 제5차 자유당전당대회에서 자기 중심의 당편제(黨編制)를 완료, 5.20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고 무소속을 포섭하여 재적 3분의 2를 넘는 137석을 확보하였다. 같은해 제2대 민의원의장에 선출되었다.
자유당의 헌법개정선 확보를 바탕으로 이승만의 종신집권의 길을 트기 위하여 초대대통령의 중임제한의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하였다가 개헌선에서 1명이 미달되어 일단 부결되었으나, 바로 다음날에 번복, 가결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같은해 인하공과대학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56년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부통령에 입후보하였다가 낙선하였고, 그해 제3대 민의원의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경기도 이천선거구에서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고 제4대 민의원의장이 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제5대정, 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의 공천으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의거로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자유당정권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붕괴되고, 이기붕 일가는 경무대관사 36호실에 피신하고 있다가 4월 28일 새벽 5시 40분경 맏아들 이강석의 총격으로 집단자살하였다. 그가 살던 서대문집은 4.19의거학생도서관이 되었다. 부인 박(朴)마리아 와의 사이에 이강석(李康石), 이강욱(李康旭) 두 아들을 두었다.
1915년 서울의 보성학교(普成學校)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형편으로 중퇴, 선교사 무스(Moose, J. R.)의 통역으로 있다가 그의 도움으로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이오와주의 패사디나시 헌팅턴호텔 등에서 일하면서 고학으로 1923년 주립대학인 데이버대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뉴욕에서 허정(許政) 등과 함께 삼일신문(三一新聞) 발간에 참여하다가 1934년 귀국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청에 들어가 군정재판장의 통역을 역임하고, 군정청 민주의원의장을 지낸 이승만(李承晩)의 신임을 받아 비서가 되었다. 1946년 대한기독청년회, 대한적십자사 등의 이사를 역임하면서 사회적 발판을 다졌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로서 정치적 기반이 굳혀졌다. 1949년 서울특별시장, 1951년 4월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어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 시절에 발생한 '국민방위군사건' 처리에 솜씨를 발휘하였다. 같은해 12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족청계 이범석(李範奭)과 함께 자유당을 창당하여 세칭 발췌개헌안 통과에 일역을 담당하였다.
1952년 대한체육회장이 되었고, 1953년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어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진출하였으며, 한미재단 한국사무소장직도 역임하였다. 같은해 12월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올라 명실공히 자유당의 제2인자가 되었다. 1954년 3월에 개최된 제5차 자유당전당대회에서 자기 중심의 당편제(黨編制)를 완료, 5.20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고 무소속을 포섭하여 재적 3분의 2를 넘는 137석을 확보하였다. 같은해 제2대 민의원의장에 선출되었다.
자유당의 헌법개정선 확보를 바탕으로 이승만의 종신집권의 길을 트기 위하여 초대대통령의 중임제한의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하였다가 개헌선에서 1명이 미달되어 일단 부결되었으나, 바로 다음날에 번복, 가결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같은해 인하공과대학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56년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부통령에 입후보하였다가 낙선하였고, 그해 제3대 민의원의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경기도 이천선거구에서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고 제4대 민의원의장이 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제5대정, 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의 공천으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의거로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자유당정권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붕괴되고, 이기붕 일가는 경무대관사 36호실에 피신하고 있다가 4월 28일 새벽 5시 40분경 맏아들 이강석의 총격으로 집단자살하였다. 그가 살던 서대문집은 4.19의거학생도서관이 되었다. 부인 박(朴)마리아 와의 사이에 이강석(李康石), 이강욱(李康旭) 두 아들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