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신익희(申翼熙)
  • 평산신씨(平山申氏),  출생~사망 : 1894 ~ 1956
제1,2대국회 국회의장. 정치가, 독립운동가. 호는 해공(海公).

경기도 광주 출생. 조선 조의 판서를 지낸 신단(申壇)의 다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 사서삼경을 비롯한 한학을 익혔고, 1908년 한성관립외국어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유학하였다.

1913년 와세다대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17년부터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의 전신인 보성법률고등학교에서 비교헌법 등의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T. W.)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됨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만주, 북경, 상해 등지를 드나들면서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을 맡아보고, 안으로는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운동의 방법을 토의하여 3.1운동의 도화선을 당기는 데 일역을 담당하였다.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그는 1919년 3월 다시 상해로 떠나 그로부터 26년간의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상해에 있는 동안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초대대의원과 초대내무차관을 지냈으며, 그뒤 내무총장, 법무총장, 문교부장, 외무부장 등을 두루 맡았고 국무원 비서실장과 의정원 부의장을 겸임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에 몸담기 시작하면서부터, 독립운동이 처음에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시작되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군사행동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임시정부에 있으면서도, 정부는 상징적인 것에 불과할 뿐 실력은 저항군에 있다는 믿음 아래,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한국청년들에 의한 군대조직을 시도해보기도 하고, 당시 상승기에 있던 중국혁명군과 연결하여 한중합작에 의한 군사행동의 실현을 추진해보기도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광복이 된 뒤 1945년 12월 임정요인의 한명으로 귀국한 그는 곧바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들어 부회장을 맡았으며, 국민대학 학장과 자유신문사 사장직도 맡았다. 그뒤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을 거쳐, 정부수립과 함께 제헌국회에 진출하였고, 대통령으로 뽑힌 초대국회의장 이승만(李承晩)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1947년에는 대한국민당을 결성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민주당과 합당, 개편된 민주국민당의 위원장으로 뽑혔다. 그동안 그는 3선국회의장으로 정치적 비중을 더해갔으며, 권력의 연장을 위하여 사사오입개헌까지 자행한 이승만 한테서 민심이 등을 돌리자,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다. 그해 5월 2일 한강백사장에서 열린 그의 유세에는 무수한 인파가 모여 그의 인기를 실증하였다. 그러나 그 3일 뒤인 5월 5일 호남 지방에서의 유세를 위하여 전주로 가던 중 기차 속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에게는 추모표로서 185만여표가 던져졌으며,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서울 우이동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