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자. 호는 중재(重齋). 명신 우옹(宇○)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도산서원(陶山書院) 원장을 지낸 극영(克永)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로 구택(龜澤)의 딸이다. 1. 성장기 1896년(고종 33) 5월 26일에 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 어촌리에서 태어났다. 5세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이미 신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09년에는 의령남씨(宜寧南氏)와 결혼하였고,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산청의 황매산(黃梅山) 서쪽 만암(○巖)이라는 깊은 산골로 이사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에만 전심하였다. 당시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주리학(主理學)을 대표하던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더욱 문명을 떨치게 되었고, 그 학통을 계승하기에 이르렀다. 2. 일제저항활동 1919년에는 스승의 명으로 곽윤(郭奫: 곽종석의 조카)과 함께 상경하여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여하였고, 여기서 김창숙(金昌淑)과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거창에 내려와서도 스승의 명을 받들어 진주, 산청, 삼가 등지의 유림을 순방하면서 장서의 취지를 설명하고 서명을 받았다. 김창숙이 장서를 가지고 상해로 떠난 뒤, 왜경에 발각되어 제1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이 일어나 옥고를 치렀다. 오래지 않아 병보석으로 풀려난 1926년에는 여러 동문과 더불어 서울에서 '면우집 ○宇集'을 간행하였는데, 그간 계속 상해에 망명중이던 김창숙이 이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였다. 김황은 김창숙의 은신처로 몰래 연락하면서 '면우집' 간행소에서 유림조직을 이용하여 모금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김창숙이 가지고 간 거액의 자금이 뒤에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주식회사투폭(東洋拓殖株式會社投爆) 등 독립운동에 사용되었음이 알려져 제2차유림단사건이 일어나자 9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1928년에는 만암을 떠나 산청군 신등면 내당촌으로 이사하여 강학(講學)을 시작하였는데, 이로부터 약 50년 동안 1천여명의 문도(門徒)를 길러냈다. 광복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이 방학기에 몰려들어 내당서사(內塘書舍)는 한때 전국유림의 중심지로 일컬어졌다. 일제강점기말에 창씨령(創氏令)이 내리자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자신이 끝내 보발(保髮)하여 전통유림의 모습을 고수하였음은 물론이고, 자녀들도 식민지 교육기관에는 보내지 않았다. 이리하여 일제의 압력은 물론, 일체의 비리와 무지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도학(道學)의 정통을 지키면서 만년에 이르도록 이를 널리 성심껏 후인들에게 전수하는 데 진력하였으며, 현대의 신지식층에게까지 이어지게 하여,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를 연결시키는 마지막 유종(儒宗)의 구실을 하였다. 1978년 12월에 죽자, 많은 조객이 운집하여 유월장(踰月葬)으로 장사지냈다. 3. 도학정립 그는 동서고금의 모든 학문을 광범하고 섬세하게 섭렵하여 한주학파의 '심즉이설(心卽理說)'을 기반으로 하는 도학을 정립하였다. '근서천군전후 謹書天君傳後', '동유심학약도 東儒心學略圖' 등에서는 심설(心說)을 중심으로 독특한 성리학계보도(性理學系譜圖)를 만들어 이황(李滉) ― 김우옹 ― 이진상(李震相) ― 곽종석으로 이어지는 계보에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심즉이설의 학통을 지켰다. 성리학적 논변에서 보인 그의 입장은 심즉이설의 개념적 분석과 논증에 따른 논리적 치밀성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동시에 물리적 내지 실리적 가치가 도학의 가치규범의 우위를 차지한 시대에 살면서, 20세기의 우리 사회가 겪은 사상사적 급류 속에서 심(心)이 공리(功利)에 미혹하여 심의 본체가 지닌 근원성을 확인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의리(義理)의 상실을 경고하며, 도덕적 주체의 자각을 정립하기 위하여 이를 실천적으로 추구하여 도학의 정통성을 굳건히 지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저서로는 사서삼경 등 역대 경학(經學)에 대한 '쇄기 ○○記', '효경장구 孝經章句', 예학(禮學)에 관한 '사례수용 四禮受用', 역사에 관한 '동사략 東史略', '역년도첩록 歷年圖捷錄', '독립제강 獨立提綱', '환영대조 ○瀛對照'(연표)와 방대한 시문집인 '익붕당총초 益朋堂叢○', 그리고 '일기 日記' 등이 남아 있다. 일명 우림(佑林), 자는 이회(而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