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에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시립 아시후중학(麻布中學)을 거쳐 1944년 일본미술학교 공예도안과를 졸업하였다. 일본공예가협회전의 가작입상(1941)을 계기로 사이토(齋藤)공예연구소에 들어가 본격적인 염색수업을 위한 도제식 직인교육을 받았다. 귀국 후 이중섭(李中燮), 한묵(韓默) 등과 교우하며 작품생활을 하다가 6, 25 때 월남하여 부산에서 최순우(崔淳雨), 박고석(朴古石), 김환기(金煥基), 장욱진(張旭鎭) 등을 만나고, 이중섭을 다시 상봉하였다. 1951년 부산에서 수출공예품전을 기획, 심사하는 등 전시의 산업육성에 관심을 쏟으며, 경상남도 도청을 설득하여 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충무 소재, 2년제)를 발족시킨 뒤 주임강사로 임명되어 나전칠기의 질적 수준 향상에 노력하였다. 이때 곤경에 처한 이중섭을 그의 하숙에 기거하게 하고, 작품생활을 뒷바라지해주었다. 1954년부터 국립박물관부설 한국조형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판화와 염색강습회를 주관하며,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및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출강하였다. 1958년 록펠러재단 장학금으로 도미하여 뉴욕대학과 프래트 컨템포러리 그래픽아트센터에서 판화수업을 하고 유럽 각국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 홍익대학교 공예과장직을 맡아 죽을 때까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공예학부장, 2부대학장, 산업미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각종 중요공모전의 운영위원, 심사위원 또는 고문을 맡았고, 또한 중요공공건축물의 건축자문위원 또는 실내디자인을 담당하는 등 실내디자인 분야에서도 큰 역량을 발휘하였다. 한편, 재미시 '미국현대판화 100인전'(1959)에 유일한 동양인으로 초대출품하였고, 귀국 후 수많은 국제전에 출품하여 판화의 국제교류에 진력하면서 1968년 이상욱(李相昱)과 함께 한국현대판화가협회를 결성하고 주도하는 등 판화계에 크게 기여하였다. 염색작품활동은 주로 초기국전을 통해서였는데, 1953년 제2회국전 문교부 장관상, 제3회국전 국무총리상 수상 이후 추천작가로서의 그의 등장은 침체된 국전공예계의 활력소가 되었고, 섬유공예발전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미국유학 이후는 염색보다 판화에 주력하여 각종 기법의 판화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작품에는 한국적 설화와 조선시대 민화에 등장하는 모티프가 많이 다루어져 전통미의 현대적 해석과 표현에 역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으며, 색채대비의 구사력이 특히 뛰어나 원시적인 건강에 빛나고 있는 색조의 세계라는 평을 듣는다.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문화포장을 받았으며, 과묵하고 실천적이었던 그는 한번도 개인전은 연 일이 없었으며 56세에 죽었다. 후학들에 의하여 마석리 모란공원묘지의 묘소에 추모비와 화비(畵碑)가 건립되었다.
13세에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시립 아시후중학(麻布中學)을 거쳐 1944년 일본미술학교 공예도안과를 졸업하였다. 일본공예가협회전의 가작입상(1941)을 계기로 사이토(齋藤)공예연구소에 들어가 본격적인 염색수업을 위한 도제식 직인교육을 받았다. 귀국 후 이중섭(李中燮), 한묵(韓默) 등과 교우하며 작품생활을 하다가 6, 25 때 월남하여 부산에서 최순우(崔淳雨), 박고석(朴古石), 김환기(金煥基), 장욱진(張旭鎭) 등을 만나고, 이중섭을 다시 상봉하였다. 1951년 부산에서 수출공예품전을 기획, 심사하는 등 전시의 산업육성에 관심을 쏟으며, 경상남도 도청을 설득하여 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충무 소재, 2년제)를 발족시킨 뒤 주임강사로 임명되어 나전칠기의 질적 수준 향상에 노력하였다. 이때 곤경에 처한 이중섭을 그의 하숙에 기거하게 하고, 작품생활을 뒷바라지해주었다. 1954년부터 국립박물관부설 한국조형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판화와 염색강습회를 주관하며,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및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출강하였다. 1958년 록펠러재단 장학금으로 도미하여 뉴욕대학과 프래트 컨템포러리 그래픽아트센터에서 판화수업을 하고 유럽 각국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 홍익대학교 공예과장직을 맡아 죽을 때까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공예학부장, 2부대학장, 산업미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각종 중요공모전의 운영위원, 심사위원 또는 고문을 맡았고, 또한 중요공공건축물의 건축자문위원 또는 실내디자인을 담당하는 등 실내디자인 분야에서도 큰 역량을 발휘하였다. 한편, 재미시 '미국현대판화 100인전'(1959)에 유일한 동양인으로 초대출품하였고, 귀국 후 수많은 국제전에 출품하여 판화의 국제교류에 진력하면서 1968년 이상욱(李相昱)과 함께 한국현대판화가협회를 결성하고 주도하는 등 판화계에 크게 기여하였다. 염색작품활동은 주로 초기국전을 통해서였는데, 1953년 제2회국전 문교부 장관상, 제3회국전 국무총리상 수상 이후 추천작가로서의 그의 등장은 침체된 국전공예계의 활력소가 되었고, 섬유공예발전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미국유학 이후는 염색보다 판화에 주력하여 각종 기법의 판화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작품에는 한국적 설화와 조선시대 민화에 등장하는 모티프가 많이 다루어져 전통미의 현대적 해석과 표현에 역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으며, 색채대비의 구사력이 특히 뛰어나 원시적인 건강에 빛나고 있는 색조의 세계라는 평을 듣는다.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문화포장을 받았으며, 과묵하고 실천적이었던 그는 한번도 개인전은 연 일이 없었으며 56세에 죽었다. 후학들에 의하여 마석리 모란공원묘지의 묘소에 추모비와 화비(畵碑)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