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성칠(金聖七)
  • 광산김씨(光山金氏),  출생~사망 : 1913 ~ 1951
역사학자. 경상북도 영천 출신. 상한(相漢)의 아들이다. 1928년 대구고등보통학교 2학년 때 독서회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간 미결수로 복역한 뒤 퇴학당하여 집에서 3년간 독학하고, 1932년 '동아일보' 농촌구제책 현상모집에 1등으로 당선되어, 이 상금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도요쿠니중학(豊國中學)에 1년간 유학하여 중학과정을 마쳤다. 1937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남도 대치(大峙), 경상북도 장계(長○) 등지에서 1941년까지 금융조합(농협의 전신) 이사로 재직하였다. 1941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여 사학을 전공하던 중 1943년 겨울 학병(學兵) 응모를 거부하고 학업도 중단되었다. 1944년 봄 다시 금융조합 이사로 복직하여 충청북도 봉양(鳳陽)에서 광복을 맞고 1945년 12월부터 1946년 3월까지 금융조합연합회 지도과장을 지냈다. 같은 달 경성대학(1945. 10. 10. 명칭 변경) 법문학부에 복학하여 그해 여름에 졸업하고 사학과 조수(助手)가 되어 연구활동을 하다가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조교수가 되었다. 그 사이 1946년 3월부터는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출강한 일이 있었고, 1951년 10월 8일 피란 수도인 부산에서 고향인 영천으로 중구절(重九節) 제사를 모시러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일찍부터 국사를 비롯한 국학 등 민족문화는 물론 청나라와 조선시대 지식층의 문화교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하여, 1941년 여름에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 10권을 완전히 번역하였으며(1948년 금융조합연합회간), 1946년에는 '조선역사 朝鮮歷史'를 펴내어 유려하고 아름다운 필치로 광복 후의 우리 겨레를 크게 깨우쳤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에 걸쳐서는 1945년 3월에 번역을 완료한 '열하일기 熱河日記' 5책을 간행하였으며, 소년시절부터 농촌, 농민에 대하여 강하게 가지고 있던 애정의 표현으로 펄벅(Buck, P.)의 '대지 大地', 강용흘(姜鏞訖)의 '초당 草堂'을 번역 출판하였고, 고어와 고대사연구를 위한 기초로 삼으려고 1950년 1월에 지명조사연구회(地名調○硏究會)를 조직하여 조사를 진행하다가 6, 25로 중단되었다. 이밖에 저서로 '동양사개설'(공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