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병도(李丙燾)
  • 우봉이씨(牛峰李氏),  출생~사망 : 1896 ~ 1989
역사학자, 교육자. 호는 두계(斗溪, 杜桂). 경기도 용인 출생. 충청도 수군절도사 봉구(鳳九)의 아들이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서울로 올라와 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1912년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에 입학하여 3년과정을 마치고 졸업하였으며, 이어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진학, 고등예과(高等豫科)를 거쳐 1919년 문학부 사학급사회학과(史學及社會學科)를 졸업하였다. 당초 서양사를 전공할 생각이었으나 한국인으로서 한국사연구의 필요성을 통감하여 공부의 방향을 바꾸었으며, '고구려 대수당전쟁(對隋唐戰爭)에 대한 연구'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하였다. 그때 교수인 요시다(吉田東伍)와 쓰다(津田左右吉) 로부터 자극과 영향을 받았고, 이케우치(池內宏) 로부터는 뒷날까지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대학졸업 후 곧 귀국하여 약 7년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며 지리, 역사 및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무렵 문학동인지 '폐허 廢墟'의 창간에 동참하였다. 뒤이어 조선사편수회 촉탁(1925∼1929),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1933∼1946),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1941∼1943)를 역임하였다. 그동안 한국사의 연구를 계속하여 많은 업적을 쌓았으며, 주로 유학사(儒學史), 지리도참(地理圖讖) 및 고대사(古代史)에 치중한 연구의 성과는 대부분 '사학잡지 史學雜誌'를 비롯한 여러 일본 학술지에 발표되었다. 그러다가 1934년 한국의 언어, 문학, 역사, 민속, 미술을 연구하는 한국인 학자들을 규합하여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창립하고 '진단학보'를 간행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이윤재(李允宰), 조윤제(趙潤濟), 손진태(孫晉泰), 이상백(李相佰) 등이 발기인으로 동참하였는데, 국문으로 된 최초의 본격적 학술지라고 할 수 있는 '진단학보'의 발간은 일제에 대한 학문적, 문화적 저항의 뜻을 함축하는 것이었고, 그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학회활동을 중단하기까지 학보 14집을 간행하여, 한국학연구의 기틀을 마련하고 그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학회창립을 주도하고, 편집과 재정을 맡았으며, '삼한문제(三韓問題)의 신고찰(新考察)'을 비롯한 자신의 새로운 논문 거의 모두를이 잡지에 발표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동지들과 진단학회를 재건하고 임시교원양성소를 설치, 국어와 국사분야 중등교원의 양성에 힘썼다. 1946년 서울대학교가 개교될 때 문리과대학과 사학과의 창설에 일익을 담당하였고, 교수에 임명되어 정년퇴임하기까지 16년간 봉직하며 후진양성과 연구에 진력하였다. 재직동안 도서관장, 박물관장 및 대학원장(1954∼1961)의 보직을 역임하였다. 1950년 6, 25가 발발하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에 피임되어 4년간 복무하였고, 19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 4, 19혁명으로 과도내각이 구성될 때 문교부장관에 취임한 바 있고, 이해에 학술원 회장에 피선되어 1981년까지 계속 중임하면서 학술의 진흥발전에 공헌하였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고, 그뒤 한때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초빙된 적도 있다. 민족문화추진회의 발족에 참여하여 부회장과 이사를 거쳐 1982년 이사장에 취임하여 한국 고전(古典)의 국역과 편찬사업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밖에 고등고시위원,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동아문화연구위원회 위원장, 교육헌장심사위원, 국토통일원 자문위원, 국정자문위원으로서 활동하였고, 율곡기념사업회 이사장, 송산학원(松山學園)이사장, 고려대학교 교우회장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여러번 외유(外遊)하여 일본, 중국과 구미(歐美)여러 나라의 학계를 시찰하였고, 미국역사학회 명예회원, 브라질학술원 명예회원에 피촉되고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술, 문화에 끼친 공적으로 1954년 금성무공훈장, 1955년 서울시문화상, 1956년 대한민국학술원상, 196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77년 인촌문화상, 1979년 5, 16민족상을 수상하였다. 1953년 진단학회가 재정비됨에 따라 이사장에 선임되었고, 1980년 그의 후원으로 학회에 두계학술상이 제정되어 후학들을 격려하게 되었던 바, 평의원회 의장으로서 죽을 때까지 전후 50여년간 진단학회를 이끌고 키워왔다. 광복 이후의 연구와 저술활동으로서 먼저 '조선사대관 朝鮮史大觀'(1948)의 출간을 들 수 있다. 국사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는 가운데 저술된이 책은 뒷날 '국사대관'(1954)으로 증보되었는데, 충실한 내용을 갖춘 본격적인 개설서로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뒤에 진단학회가 편찬한 '한국사'의 집필에 참여하여 고대편(1959)과 중세편(1961)의 두 책을 저술한 바 있다. 한편 지리도참에 대한 연구성과는 '고려시대의 연구'(1948)로 정리 간행되어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되었다. 그리고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고대사분야에 있어서는 계속 연구를 발전시켜 역사지리(歷史地理)로부터 국가의 기원과 사회제도로까지 연구영역을 확대하였으며, 그 성과를 모두 집성하여 '한국고대사연구'(1976)를 출간하였다. 고대사연구와 병행하여 '삼국사기'에 대한 역주작업을 진행시켜 '국역 삼국사기'(19 77)를 펴내기도 하였다. 일찍이 고대사, 지리도참과 더불어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유학사에 관해서는 여러 논문을 발표하며 개설서의 저작을 준비하였던 바, 그것을 등사본의 '자료한국유학사초고 資料韓國儒學史草稿'(1957)로 펴냈고, 만년에 수정증보의 과정을 거쳐 '한국유학사략'(1986)으로 공간하였으며, 한문으로 된이 책의 국문판인 '한국유학사'(1987)를 뒤이어 간행함으로써 그 연구를 마무리지었다. 그밖에도 '두계잡필'(1956)을 비롯한 많은 저서가 있고, 평생 발표한 논문은 거의 100여편에 이른다. 사학자로서 실증적, 객관적 방법을 중시하는 실증사학(實證史學)을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한국근대사학의 성립에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한국 민족과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학문적 정성을 통하여 한국사의 체계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또한, 구순(九旬)이 넘도록 이어진 꾸준한 연구와 엄격한 학풍은 많은 제자를 배출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