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종교인. 서울 출신. 길준(吉濬)의 조카이며, 성준(星濬)의 딸이다. 1910년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 제4회 졸업생으로 장로교여선교회 주선으로 북경(北京) 협화여자전문학교(協和女子專門學校) 보육과에 진학, 박양무, 유영준(劉英俊)과 동문수학하였다. 이때 여학생기독교청년회의 임원으로 활약하면서 국내에 YWCA를 조직할 것을 계획하였다. 1914년 귀국하자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스승인 겐소(Genso, M.)의 지도하에 김필례(金弼禮), 김활란(金活蘭)과 함께 YWCA창설의 기초를 닦았다. 1922년 3월 발기인회의 임시회장을 지냈으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기성회를 결성하고 제1대총무를 역임, 한국 YWCA를 맹아시켰다. 같은해 4월 북경 청화대학(淸華大學)에서 열린 만국기독교학생청년회(WSCF)총회에 감리교여성대표로 김활란, 장로교대표로 김필례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1923년 연합회구성이 완결되자 회장과 총무직을 겸임하였으며 태화관에 유치원을 개설, 아동교육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상해에서 열린 YWCA트레이닝코스(School of Method)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와 YWCA의 전국조직확대에 기여하였다. 한편, 1923년부터 국내외에서 여론화된 민족유일당운동이 구체화되어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기에 이르자, 그 창립대회에 여성대표로서 김활란과 함께 간사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여성의 특수한 문제는 신간회운동내에서 충분히 해결될 수 없다고 판단, 여성의 독자적 조직체구성에 대한 요구를 수렴, 1927년 4월 여성단체조직을 위한 12인의 준비위원 중 1인으로 선발되었다. 이때 단체명을 근우회(槿友會)라고 할 것을 제안, 채택되었다. 그뒤 창립준비위원 15인 중 1인으로서, 황신덕(黃信德), 이현경(李賢卿), 김활란, 현덕신(玄德信), 박원희(朴元熙), 김순복(金順福) 등과 함께 회원모집부문을 담당하였으며, 제1회집행위원회에서 선전조직부를 담당하였다. 한편, '청춘 靑春', '근우 槿友'에 여성의 지위향상 및 사회진출에 관한 기고를 하면서 근우회의 여성운동,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29년 11월 이후 신간회 및 근우회가 해소되자 본래의 YWCA운동에 진력하였다. 즉,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1935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37년에는 미국에서 열린 여자기독교절제회 세계대표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37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여전도회 회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