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가. 부산 출생. 아버지는 동래부사, 사천군수를 지낸 홍석(洪錫)이다. 1901년 15세 때 박영자(朴英子)와 혼인하고 같은해 장인 박기종(朴琪淙)이 설립한 개성학교에 입학하였다. 1904년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 주임이 되어 총무와 섭외를 담당하였으며, 일본어에 능통하여 일본영사관을 출입하며 대일관계 사무를 전담, 처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후 동래감리서 주임직를 사임하고 구포에 강습소를 만들고 육영에 주력하였으며, 뒤에 학교로 승격시켜 사립구명학교(구포국민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 장우석(張禹錫)과 함께 구포저축주식회사(龜浦貯蓄株式會社)를 설립, 운영하여, 1911년 임시주주총회를 개최, 은행으로 개편할 것을 결의하고 실무작업에 들어갔으나, 총독부의 방해공작으로 많은 애로를 겪었다. 1912년 구포은행 설립의 산파역을 맡았으며 감사역에 취임하였다. 구포은행은 1912년 부산지점을 개설하였고, 1915년 행명을 경남은행(慶南銀行)으로 개칭하고 본점을 부산으로 이전하였다. 그는 구포은행 설립의 산파역을 담당하면서도이 은행에서의 지위약화를 초래하였던 것은 주식지분이 미미하였기 때문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주식지분을 늘리는 한편, 경남지역의 지주들을 참여하게 하여 세력을 규합하고 자신의 주식소유를 1, 011주로 하여이 은행의 최대주주가 되었다. 1917년 정기주주총회에서 전무취체역에 피선되어 은행의 실질적 경영권을 차지하였다. 전무재임시 은행의 영업이 번창하여 마산, 하동에 지점을 신설하였고, 주일은행(主一銀行)을 흡수, 합병함으로써 자본금을 100만원으로 증자함에 이르러 영남최대의 민족계은행으로 발돋움하였다. 해외 독립투사에 대한 자금지원을 위한 대부에 협력하여 일본경찰의 요시찰인물로 낙인찍혀 1920년 자진 사임하고 34세 때 일본 동경에 체류하면서 게이오대학(慶應大學) 경제학부에 입학, 수학하면서 김성수(金性洙) 등과 교유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경남은행장에 취임하였다. 1924년 은행장을 사임하고 취체역으로만 있다가 대구은행과 합병하여 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으로 발족하자 은행계를 은퇴하고 농장경영에 주력하였다. 기업활동으로는 조선철도, 남선합동전기, 남선해륙운수, 조선운송, 남선흥업, 경춘철도주식회사 등의 주주로 활약하였고, 특히 경성방직의 설립시에는 김성수의 부탁을 받고 경남일대의 주주모집책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경상남도 재무부장을 역임하였으며 전형적인 지방기업의 선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