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학자. 평안북도 용강 출신. 부인은 차선화(車善華)이다. 진남포의 삼숭보통학교(三崇普通學校)와 평양의 광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일본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신학부에 적을 두었으며, 1932년에서 1935년까지 평양의 정의고등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5년 일본의 도호쿠제국대학(東北帝國大學) 서양사학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도호쿠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는 일본의 서양사의 태두로 일컬어지는 오루이(大類伸)와 함께 일본의 서양사학계의 쌍벽을 이루었던 하라(原隨園)가 있었다.이 두 사람 밑에서 서양사학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하라 에게서 희랍사를 전공하였다. 1938년이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평양의 광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뒤, 1939년 모교인 연희전문학교 문과의 교수가 되었다. 1971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줄곧 연세대학교에서 32년간 서양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정년퇴직 후에도 명예교수로 남았다. 연세대학교 재직중에는 사학과장, 문과대학장, 중앙도서관장, 인문과학연구소장, 부총장, 총장직무대리 등의 중책을 역임하여 대학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문과대학장 재직 때 문과대학의 학술지 '인문과학'을 창간하였고, 1964년에는 연세대학교 안에 인문과학연구소를 창설하였다. 1953∼1954년에 걸쳐 미국무성 교환교수로 미국의 미네소타대학과 하버드대학에 초빙되었으며, 특히 하버드대학에서 희랍사의 세계적 권위인 스터링(Stering, D.) 교수와 학문적 유대를 두터이 하였다. 1954년 학술원 회원에 임명되었고, 1956년 한희협회(韓希協會)를 창설, 회장에 추대되었다. 1957년에는 한국서양사학회를 창설하여 학회장에 추대되었고, 학회기관지 '서양사론'을 창간하였다. 1961년에는 정부친선사절단으로 아프리카에 다녀왔다. 1962년 문화표창을, 같은해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1964년 학술원상을, 1966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 여러 차례 국제 역사학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고, 1970년에는 한국서양사학회를 국제역사학회의에 가입시켰으며, 같은해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수많은 저서와 논문 중에서도 '희랍문화연구'(1946), '희랍사회연구'(1956), '희랍신화'(1957), '희랍사학사'(1965)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