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상백(李相佰)
  • 경주이씨(慶州李氏),  출생~사망 : 1904 ~ 1966
사회학자, 사학자, 체육인. 호는 상백(想白), 백무일재(百無一齋). 대구 출신.

1. 가계와 일본유학
이시우(李時雨)의 3남이며, 맏형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상정(李相定), 중형은 민족시인 이상화(李相和), 아우는 정통수렵인 이상오(李相旿)이다. 한말의 선각자이며 큰 부호인 큰아버지 일우(一雨)가 세운 우현서루(友絃書樓)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915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일본 와세다제일고등학원(早稻田第一高等學院)을 거쳐, 1927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를 졸업하고, 이 대학에서 사회학과 동양학을 연구하였다.

2. 동양학 연구와 교수활동
그뒤 와세다대학 동양사상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이 대학 재외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동양학연구를 더욱 깊이 하였다(1939∼1941). 일본에서 수학, 연구하는 동안에도 자주 서울을 내왕하면서 국내학계와 긴밀히 제휴하여 진단학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진단학보'에 무게있는 논문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京城大學)교수로 취임하고,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죽을 때까지 사회학과 주임교수로 재직하면서 연구와 교육에 진력하는 한편, 1957년 한국사회학회를 창설하고이 학회의 1, 2대회장으로서 한국사회학계를 주도하였다.

3. 연구실적
그의 학문분야는 크게 국사학, 사회학 및 기타로 3대분될 수가 있다. 국사분야의 연구성과는 주로 '진단학보'와 일본의 유수 학술지를 통하여 발표되었다. '서얼차대(庶○差待)의 연원에 대한 일문제'를 시작으로 하여, '삼봉인물고 三峰人物考', '이조태조(李朝太祖)의 사전개혁운동(私田改革運動)과 건국 후의 실적', '위화도회군고 威化島回軍考', '재가금지습속(再嫁禁止習俗)의 유래에 대한 연구', '우창비왕설 禑昌非王說)에 취하여', '고려말이조초(高麗末李朝初)에 있어서의 이성계일파(李成桂一派)의 전제개혁운동(田制改革運動)과 그 실적' 등이 그 주요한 것들이다. 이밖에도 진단학회편 '한국사―근대전기편―'과 '한국사―근대후기편―'을 집필하였다. 이와같이 그의 국사연구는 그 시대, 내용 등에 있어서 꽤 다양하나, 그 가운데에서도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은 여말선초의 사회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사회사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사회학분야의 활동으로는 한국사회학의 초창기에 국내최초로 사회학과를 설립하고, 대학강의와 교양지 및 학술지를 통하여 사회학의 보급에 주력한 것을 특기할 수 있다. 그는 대학에서 사회학사, 한국사회론 등을 강의하는 한편, '질서와 진보', '중간계급의 성격' 등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외국사회학의 소개에도 힘써, 이를테면 미헬스(Michels, R.)의 '정치사회학', 루섹 와런의 '사회학개론' 등의 역서를 내기도 하였다. 그의 사회학은 주로 구미의 고전이론에 바탕을 두되 그것을 한국사회의 이해에 원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사회조사에도 관심을 기울여 농촌, 사회계층 등에 관한 여러가지의 조사연구를 하였으며, 서해의 섬들에 관한 조사보고서인 '서해도서 西海島嶼'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국학, 동양학의 연구를 위하여 서울대학교에 동아문화연구소를 설립, 그 초대소장으로서 연구계획의 수립, 학술세미나의 개최 등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고고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높은 식견과 감식안을 지녀 서울대학교 박물관장, 국보,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위원, 국립박물관 심의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그 방면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밖에도 훈민정음을 해설한 '한글의 기원'을 저술하였고, 많은 논설, 국내외기행문, 수필 등을 남겼다. 그는 또한 희귀한 고활자본을 비롯한 방대한 양의 서적을 수집한 장서가로도 유명한바, 생전에 그 모두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기증, 상백문고(想白文庫)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4. 체육활동
그의 활동과 업적의 한 면이 학자, 교수였다면 다른 한 면은 체육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만큼 체육계에서의 그의 위치는 너무나도 뚜렷한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유명한 농구선수로 활약한 바 있으며, 그뒤에는 체육이론가로서 그리고 체육행정가 또는 체육계의 지도자로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그는 한국체육회장(1964∼1966), 한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1964∼1966)으로서 한국체육의 발전과 그 국제적 지위의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일찍이 로스앤젤레스올림픽(1932)을 비롯, 베를린(1936), 런던(1948), 헬싱키(1952), 멜버른(1956), 로마(1960), 동경(1964) 등 많은 올림픽대회에 임원, 선수단장 또는 대표로서 참석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마침내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죽은 뒤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해마다 한일학생농구교환경기가 열리고 있으며, 아시안게임 최우수선수에게는 이상백배(杯)가 수여되고 있다. 이밖에도 고등고시위원, 학술원회원, 교수자격심사위원, 국사편찬위원 및 3, 1문화상 심의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광범한 활동을 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일찍부터 5대양 6대주를 수없이 내왕한 여행가로서 특히 해외풍물에 대한 안목은 가위 독보적인 것이었다. 그의 장례는 서울대학교문리과대학, 한국사회학회, 진단학회,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 등 5개단체가 주관한 이상백박사연합장(李相佰博士聯合葬)으로 엄수되어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의 가족묘역에 안장되었으며, 1주기에 이희승(李熙昇)이 짓고 이기우(李基雨)가 쓴 묘비가 세워졌다. 1963년 건국문화훈장 등 생전에 여러가지 훈장과 상을 받은 바 있으며, 죽은 뒤에는 모란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