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인, 정치인. 경상북도 경산 출신. 일본 쥬오대학(中央大學) 법학부를 졸업하였고, 광복 후 경상북도경찰국 총무과장을 지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고향인 경산에서 출마, 당선된 것을 시발로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역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민주당 창당에 참여한 데 이어 1958년과 1960년의 제4대 및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역시 민주당으로 고향에서 출마, 당선되었다. 제1공화국의 국회의원 때는 정부의 금융부정을 파헤치는 데 앞장섰다. 당시 야당의원들이 대부분 다 그러하였지만 그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워 항상 빚에 쪼들리고 있었다. 아들과 딸의 학비를 마련해주어야 하겠는데 세비는 다 썼고 빚도 더 얻을 데가 없다고 어려움을 하소연하고는 하였다. 국회예산심의 때 자유당의 허위에 찬 편성방침과 그 속셈을 폭로, 지탄하던 그가 '3, 15부정선거' 직전 모 자유당 간부와 은밀히 만났다는 소문이 퍼져 민주당을 탈당할지 모른다는 추측이 돈 적이 있었으나 그렇지 않고 끝까지 야당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1960년 민주당내각 출범과 함께 구파(舊派)대표로서 교통부장관이 되었다. 입각 후에는 소속해 있던 구파보다는 총리 장면(張勉)의 신파쪽으로 정치적 입장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