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호는 추송(秋松). 황해도 재령 출신. 붕도(鵬道)의 아들이며, 동생 덕수(德秀)는 동아일보사 초대주간이었고, 덕진(德震)은 독립운동중 상해에서 순사(殉死)하였다. 1914년 '평양일일신문 平壤日日新聞'의 한국문판의 주간을 1년여 지낸 뒤, 1917년 일본에 건너가서 동경의 한국인 YMCA부간사가 되어 청년운동과 아울러 사회운동에 정열을 기울였다. 일본어에 능통한 그는 당시 일본의 데모크라시운동의 제창자로 이름난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의 요시노(吉野作造) 교수와 교분이 두터워, 민주주의사상과 우리나라의 장래에 관하여 서로 솔직하고 진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처럼 민주주의 및 민족주의에 대한 이론연구에 힘쓰는 한편, 고학하는 어려운 유학생을 위하여 자진해서 일하였다. 사색하는 것보다도 행동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1919년 3, 1독립운동 무렵에는 신병으로 요양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 곳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 홋카이도(北海道)로 뛰어들어가서 한국인 노무자들의 생활실태를 살펴보고 왔으며, 김준연(金俊淵)을 통하여 조국에서 국문신문의 창간을 서둘렀다. 1920년 4월 마침내 김성수(金性洙)를 주주대표로 한 '동아일보 東亞日報' 창간에 참획하여, 논설위원이면서 통신부장 겸 조사부장 등을 겸임하였다. 같은해 7월 홍범도(洪範圖)의 독립군이 왕청현 봉오동(汪淸縣鳳梧洞)에서 일본군 1개대대를 완전섬멸하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자, 일본군은 이를 복수하기 위한 전제수단으로 이른바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 나남의 제19사단을 비롯하여 시베리아에 출동중이던 부대 및 관동군 일부 등을 북간도로 대량 진입시키기 시작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발행정지를 당하고 있었을 때였으나 자진 종군을 지원, 그해 10월 15일 서울을 출발, 11월 6일 간도에 도착, 삼성여관(三成旅館)에 투숙하고 일본 영사관과 이른바 토벌군사령부에 종군할 것을 요청한 뒤, 일본군의 무고한 한국인대학살을 취재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곧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파의 청년지사로서, 일본식민통치 아래 최초로 순직한 언론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