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5월 2일 서울 은행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곡물 무역상 장동후(張東厚)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외할아버지 이종묵(李鍾默)의 훈도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한남보통학교(漢南普通學校)를 거쳐, 1934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들어갔다. 광복 후 1948년에는 한국은행 조사부장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한국은행부총재로 승진하였으나 1952년에 사임하고 언론계에 투신,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환도 후의 어수선하던 '조선일보'를 재건한 뒤 1954년 '태양신문'을 인수,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즈'를 창간하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57년 대한방송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텔레비전시대를 열었다. 1960년에는 '서울경제신문'과 '소년한국일보'를, 1969년에는 '일간스포츠'를 창간하였고, 이어 '주간한국'과 '주간여성' 등 여섯개의 자매지를 발행하였다. 한편, 1961년 국제신문협회 한국위원회 초대회장을 역임하였고, 1961년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대한체육회 부회장이 되었으며, 1966년 대한올림픽위원 및 아시아경기연맹 회장으로 활약, 한국체육발전에 힘썼다. 1967년 국제올림픽위원이 된 것을 계기로 아시아경기대회의 유치 등 스포츠의 국제교류에 눈부신 활동을 보였다. 특히, 1961년 최초로 공산국가인 유고슬라비아에 우리 축구팀 단장으로 원정, 공산권과의 체육외교를 폈다.
1964년에는 정일권(丁一權) 내각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발탁되어 3년반 동안 산업의 근대화와 경제자립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금리현실화와 유리창행정, 연탄의 흑백논쟁 등 숱한 일화를 남기면서 우리나라 경제의 고도성장의 기틀을 잡았다. 1964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방독(訪獨)과 1965년의 방미(訪美), 그리고 1966년의 태국 등 아시아제국방문에도 수행, 경제외교에도 힘썼다.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하여 막후에서 일해왔으며, 1969년 한일간의 현안문제를 타결하기 위하여 대통령특사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 같은해에 한일협력위원회를 창설, 창립총회 부의장이 되기도 하였다. 1971년 민주공화당 서울특별시 종로지구당 위원장에 선출된 것을 계기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어 1973년 9대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되기도 하였다.
또한, '10만 어린이 부모찾기 운동'을 벌이는 등 민족분단의 설움과 이산가족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쏟아왔는데,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1973년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공동위원장대리로 취임, 남북대화와 평화통일의 길을 여는 데 앞장섰다. 정치, 경제, 문화, 언론, 체육 등 각 분야에서 활동, 이바지한 공으로 수교훈장 광화장을 비롯하여 청조 근정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그리고 인권옹호상, 체육공로상, 최고체육장을 받았다. 외국으로부터는 독일1등대십자 공로훈장과 월남보국 2등훈장, 중화민국 1급문화훈장을 받았다.
1987년 장기영 서거 10주년에 뜻과 업적을 기리고자 그의 장남 장강재가 백상재단을 설립하고 백상예술상을 수여하고 있다.
1916년 5월 2일 서울 은행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곡물 무역상 장동후(張東厚)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외할아버지 이종묵(李鍾默)의 훈도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한남보통학교(漢南普通學校)를 거쳐, 1934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들어갔다. 광복 후 1948년에는 한국은행 조사부장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한국은행부총재로 승진하였으나 1952년에 사임하고 언론계에 투신,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환도 후의 어수선하던 '조선일보'를 재건한 뒤 1954년 '태양신문'을 인수,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즈'를 창간하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57년 대한방송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텔레비전시대를 열었다. 1960년에는 '서울경제신문'과 '소년한국일보'를, 1969년에는 '일간스포츠'를 창간하였고, 이어 '주간한국'과 '주간여성' 등 여섯개의 자매지를 발행하였다. 한편, 1961년 국제신문협회 한국위원회 초대회장을 역임하였고, 1961년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대한체육회 부회장이 되었으며, 1966년 대한올림픽위원 및 아시아경기연맹 회장으로 활약, 한국체육발전에 힘썼다. 1967년 국제올림픽위원이 된 것을 계기로 아시아경기대회의 유치 등 스포츠의 국제교류에 눈부신 활동을 보였다. 특히, 1961년 최초로 공산국가인 유고슬라비아에 우리 축구팀 단장으로 원정, 공산권과의 체육외교를 폈다.
1964년에는 정일권(丁一權) 내각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발탁되어 3년반 동안 산업의 근대화와 경제자립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금리현실화와 유리창행정, 연탄의 흑백논쟁 등 숱한 일화를 남기면서 우리나라 경제의 고도성장의 기틀을 잡았다. 1964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방독(訪獨)과 1965년의 방미(訪美), 그리고 1966년의 태국 등 아시아제국방문에도 수행, 경제외교에도 힘썼다.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하여 막후에서 일해왔으며, 1969년 한일간의 현안문제를 타결하기 위하여 대통령특사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 같은해에 한일협력위원회를 창설, 창립총회 부의장이 되기도 하였다. 1971년 민주공화당 서울특별시 종로지구당 위원장에 선출된 것을 계기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어 1973년 9대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되기도 하였다.
또한, '10만 어린이 부모찾기 운동'을 벌이는 등 민족분단의 설움과 이산가족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쏟아왔는데,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1973년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공동위원장대리로 취임, 남북대화와 평화통일의 길을 여는 데 앞장섰다. 정치, 경제, 문화, 언론, 체육 등 각 분야에서 활동, 이바지한 공으로 수교훈장 광화장을 비롯하여 청조 근정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그리고 인권옹호상, 체육공로상, 최고체육장을 받았다. 외국으로부터는 독일1등대십자 공로훈장과 월남보국 2등훈장, 중화민국 1급문화훈장을 받았다.
1987년 장기영 서거 10주년에 뜻과 업적을 기리고자 그의 장남 장강재가 백상재단을 설립하고 백상예술상을 수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