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석원(金錫源)
  • 경주김씨(慶州金氏),  출생~사망 : 1893 ~ 1978
군인. 서울 출신. 한말 무관학교 재학중 특별유학생으로 1909년에 일본에 건너가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일본육사에 진학하였다. 1915년 일본육사 제27기생으로 백홍석(白洪錫) 등과 함께 졸업하였다. 2년간 견습사관을 마친 뒤 1917년 일본군 보병 소위에 임관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때는 기관총 중대장으로 종군, 진두지휘를 하여 큰 전과를 올리고 포상금 700원을 받았다. 현재의 성남중고등학교는 바로이 상금으로 세워졌다. 1932년 소좌로 진급, 용산의 제20사단 제78연대에서 근무하던 중 1937년 7월 중일전쟁으로 종군하게 되었다. 당시 성남중고등학교 설립을 신청중이었으나, 총독부의 사학(私學) 탄압정책 때문에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에 전쟁에 죽으러가는 군인의 마지막 소원임을 강조하여 총독이 허가를 내주기로 약속하였다. 이후 7월 28일의 산시성(山西省) 동위안(東苑) 공격전에서 2개 중대로써 중국군 1개사단을 7시간의 격전 끝에 격퇴시킴으로써 공3급을 받고 영웅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뒤 대좌로 평양병사부 과장을 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일본육사 출신들의 친목단체 계림회(鷄林會)가 조직한 조선임시군사위원회의 대표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곧이어 육사 8기 특별반을 거쳐 대좌에 임관, 1949년 서울, 수색지구 주둔 제1여단장에 보임되었다. 같은해 4월 준장으로 진급, 5월에는 제1여단이 제1사단으로 편제개정되면서 사단장이 되었다. 이때, 남북교역과 관련하여 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과 대립한 끝에 1949년 10월 예편되었다. 6, 25사변이 일어나자 현역에 복귀하여 1950년 7월 수도사단장, 8월 제3사단장으로 진천 문안산전투, 영덕전투 등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해 9월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다가 1956년에 소장으로 예편되었다. 그뒤로는 1938년에 설립한 성남중고등학교장으로 주로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1960년 제5대 민의원의원이 되고 민정구락부(民政俱樂部)에 가입한 적도 있으나, 1961년부터 성남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으로 학교육성에 전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