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대 국무총리, 군인, 정치인. 호는 서암(曙巖). 1917년 9월 29일 서울 종로에서 김준원(金埈元)과 변씨(邊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대한제국 군인이었던 무관 집안이었다. 1935년 경성공립중학교(京城公立中學校)를 졸업한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일본 육군비행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의 비행중대장 및 비행전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광복후 한국군 조직에 참여했으며, 1949년 한국 공군의 초대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뒤 1957년 공군중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공군사관학교 교장, 군사정전회담한국군연락장교단장, 주한(駐韓) 유엔군사령부 한국군사사절 단장, 공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군의 중요 간부로 활약하였다. 공군에서 예편한 직후인 1957년 국방부장관이 되었다가, 4.19혁명으로 1960년 물러났다.
4.19혁명이후 야인으로 있다가 5.16이후 박정희 정권에 의해 다시 발탁되어 1963년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의 초대의장이 되었으며, 그해에 주미(駐美)대사로 임명되어 약 1년간 재직하였으며, 1966년에는 반공연맹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67년에는 민주공화당 소속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뒤, 1971년부터 실업인으로 변신하여 삼성물산(三星物産) 사장, 경제동우회(經濟同友會) 회장, 대한상공회의소(大韓商工會議所) 부회장, 정우개발(正友開發) 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약 10년간 경제인으로 활동하다가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평화통일자문회의(平和統一諮問會議) 수석부의장으로 다시 공직에 복귀하였으며, 제5공화국 말기의 정치적 과도기였던 1987년부터 1988년초까지 국무총리로 등용되었다. 제6공화국에서는 1989년부터 한일협력위원회(韓日協力委員會)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저서로 '항공(航空)의 경종(警鐘)'이 있다. 오랜 군인생활 및 공직생활로 을지, 충무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 수교훈장 광화장, 미국의 리전오브메리트 등 많은 훈장을 받았다.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대한제국 군인이었던 무관 집안이었다. 1935년 경성공립중학교(京城公立中學校)를 졸업한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일본 육군비행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의 비행중대장 및 비행전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광복후 한국군 조직에 참여했으며, 1949년 한국 공군의 초대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뒤 1957년 공군중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공군사관학교 교장, 군사정전회담한국군연락장교단장, 주한(駐韓) 유엔군사령부 한국군사사절 단장, 공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군의 중요 간부로 활약하였다. 공군에서 예편한 직후인 1957년 국방부장관이 되었다가, 4.19혁명으로 1960년 물러났다.
4.19혁명이후 야인으로 있다가 5.16이후 박정희 정권에 의해 다시 발탁되어 1963년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의 초대의장이 되었으며, 그해에 주미(駐美)대사로 임명되어 약 1년간 재직하였으며, 1966년에는 반공연맹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67년에는 민주공화당 소속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뒤, 1971년부터 실업인으로 변신하여 삼성물산(三星物産) 사장, 경제동우회(經濟同友會) 회장, 대한상공회의소(大韓商工會議所) 부회장, 정우개발(正友開發) 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약 10년간 경제인으로 활동하다가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평화통일자문회의(平和統一諮問會議) 수석부의장으로 다시 공직에 복귀하였으며, 제5공화국 말기의 정치적 과도기였던 1987년부터 1988년초까지 국무총리로 등용되었다. 제6공화국에서는 1989년부터 한일협력위원회(韓日協力委員會)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저서로 '항공(航空)의 경종(警鐘)'이 있다. 오랜 군인생활 및 공직생활로 을지, 충무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 수교훈장 광화장, 미국의 리전오브메리트 등 많은 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