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국민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1949년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마친 뒤 5.16군사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줄곧 군에 몸담았고, 1959년 제1전투단 부단장을 역임하는 등 야전경험을 두루 거쳤다. 육사 8기생인 그는 김종필(金鍾泌), 김재춘(金在春) 등과 5.16혁명세력의 주체가 되면서부터 정치가의 길을 걸었는데, 군정 때 국가재건최고회의 사법위원장을 지냈으며, 제6대 국회내무위원장을 지냈다.
또, 1966년 1월부터 3년 6개월 동안의 장기간에 걸쳐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으로서 발휘한 그의 정치적 역량은 당사무국과 집권층 내의 세력판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67년 양대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승리를 거둔 것도 사무총장으로서의 그의 치밀하고 다양하였던 선거전략, 그리고 과감한 당론 결정에 많이 힘입었다. 사무총장직을 사임하기 직전 삼선개헌 논의를 제기함으로써 헌법개정에의 길을 열어 놓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공화당 당무위원으로서 정무담당 무임소장관직을 겸임하여, 정치적인 차원에서 정부와 공화당 및 국회의 3각관계를 포괄적으로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1971년에는 당의 정책위원회 의장을 역임하는 등 공화당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갔다. 그러나 이른바 '10.2파동'은 그의 정치여정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다. 1971년 9월 30일 신민당이 경제기획원장관, 내무부장관, 법무부장관 등 3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10월 2일 본회의 표결에 부쳐졌는데, 당시 오치성(吳致成) 내무부장관의 해임안이가 107, 부 90, 무효 6표로 가결되었다. 공화당의 행동통일이 무너짐으로써 야기된이 사태는 당내에 큰 변화를 가져와 중진의원이었던 그는 제명을 당하였다. 결국 '10.2파동'으로 그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양주에서 농장경영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1948년 국민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1949년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마친 뒤 5.16군사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줄곧 군에 몸담았고, 1959년 제1전투단 부단장을 역임하는 등 야전경험을 두루 거쳤다. 육사 8기생인 그는 김종필(金鍾泌), 김재춘(金在春) 등과 5.16혁명세력의 주체가 되면서부터 정치가의 길을 걸었는데, 군정 때 국가재건최고회의 사법위원장을 지냈으며, 제6대 국회내무위원장을 지냈다.
또, 1966년 1월부터 3년 6개월 동안의 장기간에 걸쳐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으로서 발휘한 그의 정치적 역량은 당사무국과 집권층 내의 세력판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67년 양대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승리를 거둔 것도 사무총장으로서의 그의 치밀하고 다양하였던 선거전략, 그리고 과감한 당론 결정에 많이 힘입었다. 사무총장직을 사임하기 직전 삼선개헌 논의를 제기함으로써 헌법개정에의 길을 열어 놓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공화당 당무위원으로서 정무담당 무임소장관직을 겸임하여, 정치적인 차원에서 정부와 공화당 및 국회의 3각관계를 포괄적으로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1971년에는 당의 정책위원회 의장을 역임하는 등 공화당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갔다. 그러나 이른바 '10.2파동'은 그의 정치여정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다. 1971년 9월 30일 신민당이 경제기획원장관, 내무부장관, 법무부장관 등 3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10월 2일 본회의 표결에 부쳐졌는데, 당시 오치성(吳致成) 내무부장관의 해임안이가 107, 부 90, 무효 6표로 가결되었다. 공화당의 행동통일이 무너짐으로써 야기된이 사태는 당내에 큰 변화를 가져와 중진의원이었던 그는 제명을 당하였다. 결국 '10.2파동'으로 그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양주에서 농장경영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