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송요찬(宋堯讚)
  • 여산송씨(礪山宋氏),  출생~사망 : 1918 ~ 1980
군인, 정치가. 충청남도 청양 출생.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 제1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된 이후 국방경비대 소대장과 강릉 파견대장을 거쳐 1947년 소령으로 진급, 38도선 방어부대 대대장으로 근무하였다. 1948년 7월 경기도 수색에 있는 보병학교 초대교장을 지냈고, 1949년 1월 중령으로 진급된 이후 제주도폭동진압작전, 오대산공비소탕작전, 지리산공비소탕작전 등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1950년 3월 헌병사령관으로 임명되고, 재직중 북괴군의 서울 점령 직전인 6월 27일 한국은행 지금(地金)을 진해로 무사히 반출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50년 9월 준장 진급과 동시에 수도사단장에 임명되어 원산, 함흥, 청진을 함락시키는 등 동부전선에서 빛나는 전공을 올렸다.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흥남을 거쳐 철수하여 묵호에 상륙, 재정비한 뒤 총반격전에 나선 그는 수도사단장으로 강릉을 재탈환하고 이어 화천 북방에 위치한 수도고지에서 40일간의 혈전 끝에 중공군을 포함한 적군 2개 사단을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1952년 7월 소장으로 진급됨과 동시에 제8사단장에 임명되었다. 휴전 뒤 1953년 7월 미국방성 초청으로 미육군 지휘참모대학에 유학, 1년간 수학한 뒤 1954년 8월 제3군단장에 임명되고, 그해 10월 육군중장으로 승진되었다. 1956년 9월 국방대학원에서 수학한 뒤 1957년 5월 제1야전군사령관, 1959년 2월에는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육군참모총장 재직시 10만감군, 정군(整軍), 군인연금제도의 신설 등 군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자유당에 의한 3, 15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4월의거 때에는 계엄사령관으로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고 국민에게 신뢰감을 부여함으로써 유혈사태를 방지하고 4월의거를 성취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사태 수습을 마무리짓고 허정(許政)의 과도정부 출범과 함께 곧 1960년 5월 참모총장직을 사퇴, 예편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수학중 1961년 5월혁명을 맞았다. 이에 즉각 5, 16군사혁명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로 인하여 1961년 6월 혁명정부의 요청에 따라 귀국하고 국방장관 겸 최고회의 기획위원장, 내각수반 겸 외무부장관, 1962년 3월에는 내각수반 겸 경제기획원장관 등의 정부요직을 역임하고 1962년 6월 내각수반직을 사퇴하였다. 1963년 8월 8일 박정희(朴正熙)의 대통령출마를 반대하는 이른바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에 보내는 공개장'을 '동아일보'에 발표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그해 8월 11일 구속되었다. 10, 15대통령선거에 자유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옥중출마하였으나 야당단일후보옹립을 위하여 선거 1주일 전에 자퇴하고 이어 정계은퇴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11월초에 석방되었다. 그뒤 다시 친정부노선으로 전향하여 1970년 인천제철사장, 1980년에는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기도 하였으나 1980년 가을 와병으로 62세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