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학자, 교육자. 호는 한결. 경기도 광주 출신. 14세 때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신학문을 닦기 위해 상경하여 우산학교(牛山學校)에 입학하였으나, 그뒤 의법학교(懿法學校)로 전학하여 1910년 고등과를 수료하고 다시 청년학원(靑年學院)으로 옮겨 1913년에 졸업했다. 청년학원에서 주시경(周時經)의 한글(국어학)을 교육받고 크게 감화를 받았다. 1913년부터 마산 창신학교(昌信學校) 고등과 교사로 있으면서 국어, 역사, 수학을 가르치다가, 1917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에 들어갔다. 이때 연희전문학교 학생청년회가 주동이 되어 서울시내 고등보통학교, 전문학교 학생 1천여명이 조선학생의 친목과 단결을 위해 조직한 조선학생대회(朝鮮學生大會)의 회장을 맡는 등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와 1922년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1922년부터는 배화여학교(培花女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국어, 역사를 가르쳤다. 이때 학교에서 일본유학비를 받아 동경(東京)의 릿쿄대학(立敎大學) 문학부 사학과(동양사)를 1929년 졸업했다. 귀국하여 다시 배화여학교에 근무하며, 1931년 1월부터 '동광' 지에 대학졸업논문을 연재하던 중 18회로 휴간, 중단되었으나 거기에 4년여에 걸쳐 국어학연구의 각종 자료를 더하여 '조선문자급어학사 朝鮮文字及語學史'의 원고를 완성시켰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치안유지법'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교사직을 사임하고, 졸업생대표 연희전문이사직도 해임되었다. 1937년 6월에 투옥되어 이듬해 7월에 보석으로 출옥하였으며, 1938년 1월에 '조선문자급어학사'가 출판되었다. 수양동우회사건으로 5년간 실직하였다가 1942년 성신가정여학교(誠信家政女學校) 교사가 되었으나, 그해 10월에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또다시 홍원경찰서(洪原警察署)에 검거되었다. 광복 후 조선어학회 상무간사와 국어부활강사로 활약하는 한편, 연희전문학교 접수위원, 연희전문학교 이사의 일을 맡았고, 그해 10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한 이래 문학부장과 총장(대리)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 '나라말본', '중등말본'을 펴냈고, 1949년에는 '조선문자급어학사'가 4대명저(四大名著)의 하나로 표창받았다. 1952년부터는 문교부 사상지도원 전문위원, 국사편찬위원, 6, 25사변으로 인한 교사복구추진위원, 대한교육심의위원, 교수요목개정심의회 국어위원, 문교부 교과용도서활자개량위원, 연희대학교 대학원장, 국어심의회 위원, 교육용도서편찬심의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1955년에는 학문의 업적과 교육가 및 한글운동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연희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학술원회원이 되었다. 1957년에는 '고등 나라말본', '중등 나라말본'을 펴냈고, 기독교공로상, 국어공로상을 받았다. 1962년에는 '교육임시특례법'에 따라 연세대학교를 퇴임하였으나, 국어심의회 위원, 숙명여자대학교대학원과 한양대학교 강사를 역임했고, 학술문화발전공헌공로상과 한글공로상을 받았다. 1963년에는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새로 지은 국어학사'를 펴냈으며,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964년에는 전국국어국문학교수단 이사장의 일을 맡았고, 고희기념으로 '한결국어학논집'을 펴냈다. 1969년에 사망, 사회장을 지냈다. 1977년 12월 3일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